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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직농/단체 사례

개펄에 [기르는 어업]을 정착

완도 수산고등학교는 20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완도군 완도읍에 위치한 28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학교이다.

그러나 얼마전만 하여도 300여명의 학생이 빈약한 시설속에서 공부하고 있었으며, 거의가 어민들의 자제이면서도 수산기술의 습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어떻게 하면 이 어촌을 벗어날 수 있을까하는 궁리만 하면서 졸업만을 기다리는 실정이었다. 도한 지역사회 주민 역시 대부분이 낡은 고깃배 몇 척에 매달려 근해어업에 종사하거나, 개펄에 나아가 조개와 해초 등을 채취하여 근근히 생계를 이어 나가고 있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물 고등학교를 수상고등학교로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와 모교에 부임한 이성일 교사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는 가난한 고향 갯마을을 보다 잘 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서는 개펄에서 살 길을 찾아야 된다는 확신아래 자신의 전공분야를 살려「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수산업」으로 전환 시켜야 하겠다고 다짐하고, 우선 수산교육의 내실부터 다지기로 했다.

이 교사는 늘 학교에 붙어 살다시피 하면서 수산기술 지도에 필요한 300여종의 어류표본과 어망 모형 등을 정비 보완하였고 교장 선생님에게 건의하여 양어장을 새로 마련하고 어류의 산란 부화와 생식과정 등 증식을 위한 실험 실습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또한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학생들에게 지난 날이 교사가 고학하며 학업을 이어갔던 과거를 생각하고 그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학습 의욕을 북돋우어 주기도 했다.

이와같은 이 교사의 열성적인 노력은 오히려 동료 교사들로부터 따돌림과 냉소를 받게 되어 고민도 하였으나, 교장 선생님만은 그의 열의를 이해하고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도 교육위원회에서도 학교의 실정을 알고 학교의 오랜 숙원이었던 실습선과 수산가공과에 통조림 제조 시설을 마련해 주어 학교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되자 그제서야 동료 교사들도 자세가 달라지기 시작하엿다.

더구나 병고에 시달리는 아내를 돌보아야 하는 가정 환경 속에서도 학교 교육에 온갖 정신을 다하는 이 교사의 끈질김에 감동한 교직원들이 이교사를 도와 주게 되어 이 교사를 구심점으로 단합된 노력을 쏟아 부실했던 이 학교가 3년 후인 1971년에는 전국 최우수 수산고등학교로 문교부장관 표창을 받게 되었으며, 그 후 더욱 학교 교육의 내실을 기하여 1977년부터는 연2회에 걸쳐 전국 수산 경진대회에서 종합 1위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이처럼 학교의 면모가 일신되자 지금까지「물 고등학교」라고 비웃음을 받던 이 학교에 개교이래 가장 많은 지원자가 몰려 들어 마침내 학급을 증설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미역 인공 양식법 개발 성공

이렇듯 수산교육의 내실을 알차게 다져 온 이교사는 해조류 양식법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당시만 해도 주민들의 대부분이 갯바위에 자생하는 미역을 따다가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었고, 어릴때부터 가난을 뼈저리게 체험한 이 교사로서는 미역의 인공양식법의 개발은 당면한 연구과제였다.

우선 학교 배양실에서 미역포자를 길러 학교앞 바다에서 양식을 시험하기 시작하였다. 병고에 시달리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돌볼 겨를도 없이 시험 양식장으로 나갈 때는 몹시 마음이 아팠지만, 일단 바다에 나가면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미역에만 매달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일에 몰두하였다. 이같은 무서운 집념과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미역 인공양식의 오랜 꿈이 실현되었다. 이에 힘입어 이 교사는 내고장도 이제는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어촌계를 찾아가 미역을 길러 우리도 잘살아 보자고 역설하였으나 이 교사의 이야기를 들은 주민들이 바위에도 잘 자라지 않는 미역이 어떻게 새끼줄에서 자라겠느냐고 하면서 도무지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고 "어서 학교로 돌아가 학생들이냐 잘 가르치라"고 타고 갔던 배를 떠밀어 버리면서 상대도 하려 하지 않았다.

무지한 주민들에게는 백 번의 설명보다 인공양식의 성과를 직접 보여주어야 하겠다고 판단한 이 교사는 미역포자줄을 설치하고 인공양식을 하려했으나 일부 주민들은 그 줄마저 끊어 버렸다. 그러나 3개월후 잘라 버린 새끼줄에 놀랍게도 미역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어 자신도 모르게 함성을 지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 교사가 미역을 건져 주민들에게 달려가 이래도 못 믿겠느냐고 말하자 지금까지 미친 사람이라고 상대도 하지 않던 주민들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미역 선생님」하면서 잔치를 베풀기까지 하였다. 그 후 미역 선생님을 모셔 가려는 주민들의 극성 때문에 이 교사는 휴일은 말할 것도 없고, 몸이 고달파 집에서 쉬려 해도 쉴 수 조차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같은 이 교사의 희생적인 지도로 1969년에 겨우300톤에 불과했던 미역 생산량이 1970년에 무려 200배가 넘는 6만5천톤으로 26억원의 소득을 올리는 동시 그중 염장가공된 1만3천톤을 수출하여 41억원의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전천후 김 양식법 개발

미역양식에서 자신을 얻은 이교사는 이제 이 고장 소득원의 대종을 이루는 김의 양식법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김 하면 완도를 연상할 만큼, 이곳의 김 생산량은 전국의 약 43%에 달하며, 주민의 반이상이 김 양식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김 생산 방법은 바다에 김발을 띄워놓고 김 포자가 발에 붙기만을 기다리는 구태의연한 것이어서 김 포자를 배양해서 직접 붙여 주는 방법을 개발해야 된다고 생각한 이교사는 1975년 우선 학교에 배양실을 마련하고 부족한 실험비용은 박봉을 털어 충당하면서 6개월 동안을 실험실에 파묻혀 연구한 결과 김 포자 배양에는 일단 성공을 했으나 그 동안의 집안 살림은 더욱 어려워졌고, 본인마저 겹친 과로로 병석에 눕게 되자, 가족은 물론 동료교사와 주민들까지도 그만 좀 쉬라고 권했다. 그러나 지친 몸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포자가 배양된 조개껍질을 김발에 달아 주는 일을 계속했으나 그 때마다 대부분의 포자가 바닷물에 씻겨 버려 주민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교사는 살을 에이는 듯한 바닷바람을 헤치며 김발을 보살피다 배가 뒤집혀 위험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으나 이에 좌절하지 않고 연구를 거듭하여 포자가 바닷물에 유실되지 않도록 틀을 만들어 김발을 올려놓은 다음 이것을 비닐 자루 속에 넣어서 바다에 띄워 본 결과 포자 유실을 막고 잡태도 끼지 않은 완전 채묘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처럼 천신만고 끝에 완전 채묘된 김발을 들고 바다에 나간 그는 김발을 치는데 필요한 말목이 문제가 되어 다시 큰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부류식 건흥법의 개발

종래 양식 방법은 썰물 때가 되면 김발이 물밖에 노출되어 이상 난동시에는 병해를 입게 되므로 그 해의 김 농사를 그르치게 될 뿐 아니라, 말목을 구하기 위해 머나먼 산골까지 선금을 가지고 달려가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이를 쓰지 않고 김발을 바다에 띄우는 방법을 생각한 끝에 마침내 말목대신 부자를 이용해서 바다에 김발을 띄우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 부류식 건흥법은 첫째, 항상 물 위에 떠 있으므로 기상 조건의 영향을 받지 않아 전천후 양식이 가능하며, 둘째 말목을 쓰지 않으므로 산림보호는 물론 많은 경비와 노력을 절감할 수있어 김 양식에 일대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라고 확신한 그는 이 방법을 주민들에게 지도해서 1976년에 처음시도해 보았으나 예상외로 그 해 김 농사는 큰 흉작을 면치 못했다. 이에 분개한 일부 주민들은 이 교사를 무조건 믿고 따른 것이 큰 잘못이었다면서 허황한 방법을 무책임하게 권장했으니 마땅히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대들기까지 했다.

신품종 도입으로 김양식 개발성공

이 교사는 억울하고 분했지만 묵묵히 연구를 계속하여 실패 원인이 품종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우량 품종 개발을 위해 고심하던 끝에 부산 수산대학에서 연구해 낸 새 품종인 대엽김을 분양받아 완도해역에 맞도록 배양시험을 한 결과 재래종에 비해 성장이 빠르고 이상난동에도 잘 견뎌내는 우량종임을 확인한 후 몇몇 뜻있는 주민들을 설득해서 다시 분양하여 양식을 해 보았더니, 때마침 이상난동으로 인해 재래종은 거의 실패하였으나 이 새 품종만은 다수확을 거두게 되자 주민들도 이 방법을 다투어 받아 들이게 되어 1973년에 498만 속이었던 김 생산량이 1976년에는 843만 속으로 증산되었고 올해는 990만 속으로 늘어날 것이 예상되어 완도 관내에 보급된 2,450책 김발 설치에 필요한 말목 대금 9,500여만원과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군민의 스승이 된 이 교사

그후 이 교사는 자신이 개발한 해조류 양식법을 매년 여름방학 중에 개설하는 상설 새마을학교에서 지도했고 어촌 구석 구석을 찾아 다니며 지난 10년 간에 걸쳐 720회에 57,000여명에게 그이 피땀어린 새 양식법을 지도해서 김의 생산 방법의 혁신을 이룩함으로써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 교사의 업적이 보도를 통해 알려지자 격려와 문의 서신이 쇄도하였고 드디어 15만 완도 군민은 이 교사에게 "군민의 상"을 주어 "군민의 스승이요, 개펄의 횃불"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학교를 찾는 어민들의 수도 날로 증가하여 이제 완도 수산고등학교는 명실공히 지역 개발의 선도적 역할을 다하여 주민들의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할 수있게 되었다.

다도해를 소득의 보고로 개척

앞으로 수출 전망이 밝은 식용 및 약용 해조류인 톳을 2년여에 걸쳐 시험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평당 2.5kg에서 3kg으로 증산 할 수 있는 방법을 널리 지도 보급하여 미역, 김과 함께 이 지역의 삼대 소득원으로 발전시켜 호당 소득 189만원에서 올해는 220만원으로 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박대통령의 특별 지원금으로 수산물 배양실을 건립하여 새로운 양식기술의 개발과 학생들은 물론 이곳 어민들의「기르는 수산업」의 산 교육장이 되도록하여, 완도 수산고등학교가 다도해의 보고를 개척하는 선진지가 되어 수산 기술인의 양성에 전력을 다하여 바다와 더불어 생활하는 자영 수산인을 길러 삼면의 바다와 5대양을 개척할 수 있는 어민상을 정립하는데 오늘도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전남 완도 수산고등학교 교사 이성일

공장 새마을운동

노사의 합심노력

경부고속도로에서 부산으로 진입하는 산업도로변, 동래구 부곡동에 위치한 이 회사는 1,500명의 사원이 일치단결하여 면사와 면복지인 골덴,우단,데님을 생산하여 78년도에 3,600만불의 제품을 해외 40개국에 수출하였으며 매출총액이 274억원에 이르는 자본금 20억원 규모의 공개기업이다.

이 회사 황래성 사장은 약관 20세부터 사업을하여 여러 가지 공장을 경영해 오던 중 1955년 일본에서 골덴,우단의 생산기술을 직접 배우고 돌아와 이듬해 남의 공장 일부를 빌려 국내최초로 골덴,우단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태창기업공사를 설립하였다.

8년간의 각고의 노력 끝에 현재의 위치에 터전을 잡게 되었으며, 1967년에는 수출을 목표로 공장을 증설하였으나 초기에는 시설이 남아돌고 기술부족과 시장개척부진으로 자금사정이 악화되어 제때에 종업원 봉급을 주지 못할 형편이 되었으며 많은 부채도 안게 되었었다.

하나, 둘 회사를 떠나가는 종업원들이 생기고 채권자들의 독촉이 성화 같이 곧 회사의 문을 닫아야만 할 정도의 위기에 처했었다.

이때 황사장은 자기집을 처분하여 우선 종업원들의 급료를 지불하고 부채의 일부를 상환하는 한편, 공장안에서 숙식을 해가며 불철주야 재기를 위한 집념을 불태웠으며, 이에 감격한 종업원들도 적극 호응하여 합심단결 회사를 살리고자 피땀어린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었다.

노사가 단합되어 품질향상, 신제품 개발, 판로 개척에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 매출이 크게 신장되어 1973년에는 판매고가 32억원에 이르고 1억6천만원의 흑자도 올리게 되었었다.

새마을운동의 불길 타오르다.

국내외 시장에서 제품이 호평을 받고 회사가 다소 안정되어 가자 간부들과 종업원들 모두 안일에 젖어 열기가 점차 식어가던 중, 황 사장의 수원 새마을연수원의 새마을교육은 공장 새마을운동추진에 큰 전환점이 되었었다.

교육을 통해 깊은 감명을 받고 온 사장은 공장 새마을운동만이 다함께 살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을 갖고 경영방침의 일환으로 새마을운동의 강력한 추진을 내걸게 되었다.

우선 전 간부사원으로 하여금 새마을교육을 받도록 했으며, 총무부장인 남선기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전 종업원에 대한 집중적인 자체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사장과 부장급 이상으로 구성된 공장 새마을운동 추진협의회와 남 지도자를 중심으로하여 현장 과ㆍ계장들로 구성된 실천지도자회를 설치하여 사업계획을 세우고 체계적으로 강력히 추진하게 되었으며 새마을 전진대회를 개최하여 전사적으로 새마을운동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사원을 가족처럼, 공장일을 내일처럼

먼저 공장을 가정처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황사장은 출근하면 항상 공장안을 돌며 사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월 2회 이상 노사협의회를 열어 사원들의 관심사와 고정을 처리해 주었으며 합동 생일잔치를 마련하여 가족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월요일 아침마다 새마을조회를 실시하여 금주의 계획을 알려줌으로써 참여의식을 고취시키고 새로운 한주의 활도에 임할 자세를 다지는 한편, 매일 국기게양식과 강하식을 거행하여 애국.애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였으며 매년 여름에는 4~5일간씩의 유급휴가를 실시하고 광안리해수욕장에 회사가 모든 비용을 부담, 사원가족 하계휴양소를 설치하여 심신을 휴양토록 하였으며, 봄 가을 2회에 걸쳐 사원가족 야유회를 마련하여 회사와 사원가족과의 유대를 더욱 두텁게 하였다.

3월과 10월에 실시되는 사내체육대회를 통해 사원들의 체력단련과 부서간의 결속을 강화시켰으며 건전가요 부르기 운동을 전개하고 이를 장려하기 위하여 매년 2회 분임조대항 건전가요 가창대회도 개최하였다.

이렇게 명랑한 분위기 속에 사원들의 얼굴은 언제나 밝고 활기찼으며 회사일에 솔선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새벽의 사나이"로 통하는 남 지도자는 매일 아침 6시경이면 기숙사생들과 어울려 공장내외를 청소하고 회사주변의 하천과 골목길을 정화하였으며 회사내 공터에는 틈틈이 꽃과 나무를 심어 아름답고 깨끗한 공장으로 가꾸었으며 또한 쾌적한 환경속에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개선하였을 뿐 아니라 금년 4월에는 3억 3천만원을 들여 최신 폐수처리시설을 준공하여 가동함으로써 공해방지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 일은 우리 손으로

노사단합으로 가족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좋은 작업환경을 갖추어가는 가운데 사원들은 "우리 일은 우리 손으로"라는 정신으로 작업반별로 181개의 분임조를 구성하여 품질 향상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저마다의 지혜와 노력을 경주하였다.

남 지도자는 아침부터 밤까지 쉬임없이 각분임조의 활동을 지도하고 격려하였으며, 분임조장과 분임조외 서기들에게는 특별교육도 실시하였다.

회사 또한 이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분임토의시에 간식을 주고 귀가시에는 교통비를 지급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분기별로 경진대회를 개최하여 토의 내용을 발표토록 하고, 우수사례는 사내작업에 채택하며 해당분임조 전원을 시상하고 승진과 승급을 시켜 사기를 진작시키자 여러 가지 우수한 사례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중 두가지를 소개하면 골덴의 털을 만드는 전모과에서 털을 만들 때 사용하는 캇터가 전량 일본에서 수입되고 있는 것을 알고 10명의 분임원들이 연구한 결과 더욱 정밀하고 기계의 특성에도 맞는 캇타를 자체 제작함으로써 년간 2천4백만원의 원가를 절감시키는 동시에 귀중한 외화도 절약하게 된 예가 있으며, 또 원단의 풀을 빼는 작업을하는 호발과 백마 분임조에서는 풀을 제거하는 값비싼 약물을 한 번 사용후 버리는 것을 매우 아쉽게 여기고 이를 연구 토의한 결과 한 번 쓴 약물을 다시 쓸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함으로써 년간 5백50만원의 원가를 절감시키는 동시에 약물의 유출로 심한 악취가 풍기던 것을 방지함으로써 작업환경 개선에도 도움이 된 사례가 있다.

이러한 종류의 분임활동의 결과는 76년 14.8%이던 불량발생율이 78년에는 그 절반수준인 7.3%로 낮아졌고 이에따라 77년에는 2억 5,600만원, 78년에는 2억8,400만원의 원가절감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특히 이 회사에서는 공장내에 설치한 철공소에서 600만불 상당의 염색가공기계를 자체 특성에 맞게 제작 사용함으로써 수입했을 경우보다 18억원의 시설비를 절약한 바도 있다.

이윤의 환원

황 사장은 이렇게 사원들이 노력한 결과 얻은 기업이윤과 성과를 사원들에게 환원하기 위하여 소유주신의 30%를 무상분양하고 후생복지 시설도 년차적으로 확충해 나갔다.

기숙사에는 여가시간을 함께 즐기며 활용할 수 있는 휴게실과 공동세탁장 도서실 등을 마련하여 주었으며, 종래 반액 부담하던 구내식당의 식비를 전액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데 황 사장 자신도 항상 이 식당에서 종업원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식당 아주머니들은 사원급식 관리에 항상 세심한 신경을 쓸 뿐 아니라

각 분임조 활동을 보고 의논 끝에 자체에서 간식용빵을 만들기로 하였으며 이외에도 콩나물 기르기등으로 연간 260만원의 부식비를 절약하고 있다.

또한 폐기물을 연료로 이용하여 항상 온수를 공급할 수 있는 60평 규모의 목욕탕을 건립하는 동시에 사원들의 심신단결과 여가선용을 위해서 정구장, 배구장, 탁구대 등의 체육시설도 갖추었고 공장내에 의무실을 설치하여 사원의 건강관리에도 발전을 기하고 있다.

또한 10년이상 근속한 30명에게는 내집마련을 위한 대지와 건축비를 무상 지원하고 7년이상 근속한 38명에게는 대지를 무상분양 해줌으로써 모두 3억9천만원을 들여 68명의 주택문제를 해결해 주었고 가정형편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종업원들을 위해 야간특별학급에 60명을 취학시켜 오던중 79년 3월에는 공장내에 부설 여자상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154명을 취학시키고 학자금 일체를 회사가 돌보고 있다. 그리고 종업원 뿐만 아니라 종업원 자녀의 취학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전사원 자녀의 학비일체를 회사가 장학금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79년도에는 약 4천만원이 지급될 계획이다.

황 사장 자신이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고난과 역경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평소 근검절약의 자세가 몸에 배어 있어서 공장안을 돌아볼때도 불필요한 곳에 켜진 전기불을 끄는가 하면 미쳐 잠기지않은 수도꼭지를 잠그기도 하며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고 있다.

종업원들도 이러한 사장의 생활자세를 본받아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절약의 지혜를 짜내어 이를 실천하고 있으며 비닐포장지 조각 하나까지도 버리지 않고 깨끗이 간수하여 다시 사용하는등 이 회사에서 사치와 낭비의 요소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아 볼 수없을 정도이다.

또한 저축심을 앙양시키기 위해 사장이 3천3백만원을 희사하여 77년 3월 새마을금고를 설치하자 전사원이 참여하여 79년 상반기 현재 1억9,100만원의 기금을 조성하게 되었으며 재형저축등 각종 저축액 또한 1억여원에 이르고 있다.

지역사회 지원

이와같은 회사내의 활동 이외에 이웃돕기와 지역사회 지원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수시로 양로원과 고아원을 방문하여 외롭게 지내고 있는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동시에 회사 인근 극빈 가정들을 돕기 위해 78년 한 해만도430만원을 지원하였으며 또한 해마다 농번기에는 일손이 부족한 농촌을 찾아 노력봉사를 해주는 한편 원호성금, 이재민돕기 등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회사에서는 앞으로도 더욱 꾸준한 공장 새마을운동의 추진으로 모범적인 복지공장을 구현해 나가도록 노력을 일충 강화하여 주택지원사업을 년차적으로 확대하여 무주택사원이 한사람도 없도록 할 계획이며 3개년 계획으로 부설 여자상업고등학교를 확충하여 이 회사 사원뿐만 아니라 하청 중소기업체 사원에게도 교육기회를 부여할 계획으로 있으며 공동구판장, 이발소, 도서실과 휴게실 등을 갖춘 종합 복지회관을 79년내에 건립하여 사원들의 복지증진에 더욱 효과있게 기여할 계획이다

부산시 동래구 태창기업(주)대표 황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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