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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

보통학교 입학

박정희 소년은 1926년 아홉 살 되던 해 구미공립보통학교(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당시 상모리는 90호나 되는 제법 큰 마을인데도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단 세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를 제외한 두 아이는 얼마간 다니다가 스스로 퇴학해 버리고 말았다. 그 부모가 학교에 가서 철봉과 뜀틀 같은 체육하는 광경을 보고 저러다가 아이들 병신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학교를 그만 두게 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어린 시절에 그를 슬프게 했던 것은 바로 위의 형이었던 한생(漢生)의 죽음이었다. 한생은 열네 살 때 죽었으며 박정희보다 다섯 살 위였기 때문에 유년시절에는 어느 형보다도 가까이 지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형의 죽음이 가져온 가정적 어두운 분위기, 또 얼마 안 있어 학교친구들의 자진퇴학 등으로 박정희 소년은 혼자서 하루에 40리 길을 왔다갔다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몸이 실한 편은 아니었다. 특히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새벽밥이라 아침을 잘 먹지 못하고, 겨울에는 도시락이 꽁꽁 얼어서 먹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한때는 밤눈이 어두워 밤에는 장님처럼 되어 변소 길도 식구들이 데려가곤 했다.

보통학교 시절에는 산골소년의 일상적인 생활에 익숙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는 소를 먹여야 하고 꼴을 베어야만 했다. 그리고 겨울에는 뒷동산에 가서 갈비(낙엽)를 긁어모아 땔감을 해오기도 했으며 가을 추수철에는 볏단을 나르기도하여 야생초처럼 풋풋한 나날을 보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 적이 있다.


「한국의 농민을 대(大) 중(中) 소(小)의 셋으로 나눈다면 우리 집은 소농(小農)에 해당하는 아주 가난한 농사꾼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때 우리는 축구공 하나 살 수 없어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짚을 뭉쳐 새끼로 동여맨 다음 그것을 논바닥에서 맨발로 차다보면 발끝마다 멍이 들고 피가 맺혔으니까˙˙˙˙. 그리고 어느 해 추석 안날이었지. 학교에서는 내일이 추석명절이라고 오전 수업만 하고 학생들을 집으로 보내 주었다. 마을에 들어서니 떡을 치고 전 부치는 구수한 냄새가 온 마을에 서려 있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집에 들어서자 전혀 음식을 장만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던 그날의 냉랭하던 정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나는 퍽 조그마한 소년이었지. 여름방학 때는 내가 소를 먹여야 했다. 마을 아이들과 산골짜기에 소를 먹이러 가면 감자삼굿도 해 먹고 고기도 잡았지. 바위를 들쳐 가재를 잡고 중태 미꾸라지 방가재를 잡으며 긴긴 여름 해를 보내던 기억이 나는구먼, 그때 우리집 황소가 제멋대로 나를 끌었기 때문에 나는 퍽 애를 먹었다.」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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