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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

어두웠던 시대상

박정희가 태어나던 1917년은 한국민족이 일본의 지배하에서 암울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무렵이다.
즉 5백년의 조선왕조가 무너져 버리고 1910년의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나라를 빼앗긴 한국민족은 가난과 무지, 실의와 좌절, 울분과 통한 속에서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이 어두운 시대에 박정희는 뱃속에서부터 많은 시련을 겪으며 태어났다. 그러므로 박정희의 탄생은 집안 형편으로 보아 바라지도 않았으나 어쨌든 강요되었다는 점에서 극적(劇的)인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

메주 뜨는 냄새와 서까래가 보이는 천정에 파리똥이 새까맣게 앉은 황토벽으로 된 방에는 신문지 한 장도 바르지 않았다. 장대 두 개로 시렁을 지르고 그 위에 세간을 차려놓고 사는 전형적인 한국농촌의 토방(土房)속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자식을 귀여워하는 정은 늦게 둘수록 더욱 깊어진다 함은 더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하늘이 점지해 주신 것을 사람이 거역해 보려고 했던 한때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그의 어머니는 갓 태어난 아기에 대하여 더욱 깊은 애정을 쏟았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어머니의 젖꼭지가 말라붙어 젖을 먹일 수가 없었다. 밥물에다가 곶감을 넣어 끓여서 그것을 모유 대신 먹였던 것이므로 때로는 변비가 생기기도 했다.

두 살 때는 화상을 입고 몸에 흉터가 생기기도 했고 먹는 것이 부실하여 발육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살림은 비록 가난했을망정 어머니의 깊은 애정 속에서 시난고난 잔병치레를 해 가면서도 탈없이 자라났다.


박정희가 태어난 집은 상모리 마을 앞에서 바라보면 동북쪽의 산 중턱에 위치한 마을의 끝집이다. 뒤로는 멀리 금오산을 등지고 나즈막한 두 개의 산봉우리가 에워싸고 있는 모습은 마치 새둥지처럼 보이는 형상이다.

집 주위에는 감나무가 많고 대나무 숲이 우거져 사시사철 푸른 동산이다. 봄에는 뒷동산에 진달래가 만발했다. 다복솔이 우거진 사이로 울긋불긋한 진달래가 마치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봄동산은 산촌의 아이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진달래가 피면 농촌에는 어김없이 <보릿고개> <춘궁기>가 찾아왔다. 기나긴 삼동(三冬)을 지내느라고 양식은 떨어지고 아직 보리는 나기 전의 봄살이가 호랑이보다도 더 무섭던 시절에 박정희도 이맘때가 되면 마을 아이들과 더불어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진달래 꽃잎을 따먹기도 했고 논두렁 밭두렁의 삘기를 뽑아 먹기도 하였으며 찔레순을 꺾어 먹고 허기를 면해 보려고도 했다. 특히 감꽃이 필 무렵이면 감꽃을 주어 먹기도 했다.

그리고 박정희의 유년시절 이었던 1920년대는 <3.1운동>의 폭풍이 지나간 허탈감이 한국사회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성장해 온 박정희의 가슴속에 비록 무의식의 세계이기는 했지만 민족적 감정의 굴절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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