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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농/어촌 사례

땀으로 얼룩진 전천후 농천

영천읍에서 청송방면으로 비포장 도로를 따라 5km쯤에 위치한 이 마을은 고현천을 경계로 과수원이 밀집한 중산간 마을로 가구의 대부분이 영일 정씨인 씨족부락이다.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이 마을 100여가구에 경지면적이 고작 40ha에 불과하여 보리고개만 되면 풀씨를 훑여다죽을 쑤어 연명해야 할 정도의 굶주림과 싸웠으나 양반이라는 전통적 가치관만 내세우고 허세만을 부리며 시대적 감각이 둔하여 마을의 발전이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낙후마을 이었다.
누대의 가난을 벗게한 새마을사업

이러한 마을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정진욱씨가 71년 영남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대구 제일모직에 근무하던 중 심한 위장병의 악화로 직장생활을 할 수 없어 휴양차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 3개월만에 몸은 회복되었으나 끼니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마을 주민들의 생활을 보고 이는 우리 젊은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이때에 마침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게 되자 이 운동이 곧 마을을 살리고 누대의 가난을 벗어버릴 수 있는 기회라 생각, 정지도자는 이영광스런 대열에 서리라는 사명감으로 직장을 박차고 고향마을에 정착하게 되어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고향의 청년들과 단합 새로운 고장만들기를 결의하였다.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을때는 부모님이나 주위의 태도가 좋을리 없었지만, 이 정체된 마을을 부활시키는 길은 능력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토양시험등 사전에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800평의 논에 신품종 과수묘목 10천본을 식재하였다.

이웃 경산의 전문가와 지도소의 자문으로 아이를 보살피듯 애를 쓴 덕에 다행히 2년 후인 73년도에는 5,000본의 묘목을 주당 400원씩에 팔 수 있게 되어 2,000천원의 소득을 올려 노력하면 잘살 수 있다는 현실적인 시범을 보였다. 눈에 보이는 실적은 주민들의 많은 공감을 얻어 73년 주민총회에서 새마을지도자로 선출되었으며, 전주민에게 소득이 돌아갈 수 있는 사업을 연구하던 중 대학선배의 권유와 주선에 따라 답이작으로 일본동식상사와 딸기를 계약재배하여 주민들은 총5백만원의 소득을 올리게되었으며 이 소득을 발판으로 전기가설사업을 착수하기로 했다.

처음 주민들은 아직 의식주 해결로 어려운판에 전기는 없어도 살 수 있다면 반대를 해왔으나 청년회를 중심으로 개인별 설득을 하기로 결정하고 농촌문화생활과 신속한 농사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전기는 필수적인 것이라는 것과 금년에 얻은 딸기수입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하여 주민의 동의를 얻어 내는데 성공, 단위조합에 주민공동명의로 4,000천원을 융자받아 73년 3월에 착공하여 9월에 완공하였으며 이 사업을 추진한 여력으로 부녀자들의 숙원사업이던 간이상수도 사업에 지원 700천원 자부담 800천원 총1,500천원으로 착수하여 만1개월만에 공사를 완료하여 새마을사업이 부녀층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시범농장을 만들다

이러한 사업들은 차츰 주민전체에 자신감과 의욕을 불어 넣게 되어 무언가 새로운 사업에 스스로 눈을 돌리려는 열기가 일어났다. 이때를 맞추어 청년회원을 중심으로 74년 고현천 하천부지를 개간하기로 결정하고 시안을 마련 사업에 착수하였다. 농한기를 이용한 겨울철 작업이어서 살을 이는 듯한 찬바람 속에서도 주민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일을 해왔으나 자금조달계획이 부진하여 고심하던 중, 하고자 하는 의욕있는 마을을 우선적으로 지원하다는 행정당국이 세계은행차관 5백 만원을 융자받게 해주어 한겨울 동안을 끌던 6,000평의 개간사업을 완료되었다.

정 지도자는 자기의 집에 심어 놓은 2천주의 묘목을 내놓아 공동과수단지로 만들기로 하였으며, 기계영농화도 병행하기 위하여 스프링쿨러 시설까지 완비하여 현재에는 군내 시범농장으로 많은 사람들의 견학장이 되고 있다.

야산을 옥답으로

규모가 작은 사업으로는 주민의 획기적인 소득증대를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76년 경사도 30도의 마을 뒷산 45ha를 개간하여 논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우선 청년회에서 사업분야별로 경험이 있는 회원이 시안을 작성, 이를 가지고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하고 최종 사업계획서를 확정하니 공사비가 63백만원이 소요되는 이 사업계획서를 주민에게 설득해 보았으니 마을 형편으로는 너무 과욕적이고 방대한 사업이라며 젊은 층의 만용정도로밖에 여기질 않았다.

그러나 정 지도자를 비롯해 청년회원들은 이 사업이 창녕골의 역사를 바뀌게 하는 일이라 믿고 일치단결하여 쉽게 공감을 할 수 있는 부녀회원과 뜻을 같이하는 주민들로 우선 사업에 착수하기로 햇다. 착공을 위한 사업기금 마련을 위해 평소 청년회원들의 열성과 정 지도자의 애향심에 감복적극 지원을 아끼지 않던 단위 농협 조합장이 개간의 경제적 여부를 타진하고 난후 상환의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 30백만원을 융자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읍사무소 군청등 행정관서를 찾아 다니며 사업의 취지와 경제성을 설명하여 15백만원의 지원을 받게 되었으나 나머지 18백만원의 해결 방안이 없었다.

모두가 모여 숙의한 끝에 이 고장 출신의로 외지에 나가 입신한 사람들에게 찾아 다니며 고향의 사업에 기금을 요청하기로 결정 대구, 서울, 부산 등 대도시를 지역별로 맡아 모금한 결과 8,500천원이란 금액을 지원받는데 성공했으며 부족금 9,500천원은 주민들의 인력자원으로 충당하기로 하고 76년 2월에 개간에 착수하여 12월에 사업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물이 있어야 충분한 농사를 지을 수 있으므로 개답지를 전천후 농토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160마력짜리 동력양수장을 개설하고 양수장에서 저수지까지 1,500m의 거리에 7인치 파이프를 매설하였으며 집수정과 저수지 2개소를 설치하였다.

이 사업을 완공하는데는 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양수장 파이프를 설치할 때 과수원을 지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으나 주인이 과수원을 버린다고 완강히 거절하여 정 지도자는 무려14일 동안이나 조석으로 찾아 허락을 간청했더니 나중에는 과수원 주인이 지쳐서 내 고집도 어지간하지만 지도자의 고집은 더하구나 하며 허락을 해 주어 무사히 파이프를 매설 할 수 있었으며 추위가 오기 전에 사업을 마무리 해야겠다는 욕심에서 철야작업을 강행하다 피로가 겹쳐 사업장에서 쓰러진 적도 여러번이었다.

80년대를 향한 목표

지도자 뿐만아니라 청년회원 대부분이 그랬듯이 부모들은 잘사는 것도 좋지만 사람 죽이겠다고 항의소동을 벌릴 때는 새마을사업에 대해 회의도 느껴 보았고 도시에서 자라나 공대를 졸업한 전문적인 기사라고 시집온 아내는 남편이 날이면 날마다 흙투성이가 된 지친 몸이 되어 들어오고 가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으니 자연 불평도 높아져서 과격한 충돌을 하는 가정불화의 경험도 당해야 했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넘기면서 완공된 개간지에서 77년에는 2,250가마의 벼를 수확하여 수매한 결과 생산비를 제외한 20백만원을 농협단위조합에 상환하게 되었으며 79년에는 부채전액을 상환할 수 있게 되었다.

땀으로 가설한 녹전교

마을의 위치가 한마디로 비만 오면 육지의 섬이 되어 버려 강 건너 바로학교가 있으면서도 가지 못하는 학생들의 안타까움과 장마철에 생산되는 포도를 출하하지 못하여 그대로 썩히는 일을 정말 가슴 아프게 느껴왔으므로 77년 1월 주민들의 숙원사업인 마을 앞을 흐르는 고현천에 교량을 가설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마을총회에 안건을 부쳤으나 주민들은 아무리 숙원사업이라해도 거대한 개간사업에 너무도 지쳐 사업을 강행하기는 불가능이란는 것과 계속되는 사업으로 인한 공사비용 염출의 어려움 때문에 지지도 얻지 못하고 반대에 부딛쳤다. 그러나 청년회원들을 주축으로 행정당국의 지원급4백만원과 개간지를 담보로하여 단위조합에 9백만원을 융자받아 총13백 만원으로 녹전교를 착공했다. 동분서주 바쁘게 돌아다니며 사업추친을 하다가 착공한지 1개월만인 2월 10일 공사부품을 구입해 오는 도중 오토바이사고로 왼쪽다리가 골절되어 1개월간 기브스를 해야하는 고통을 당했으나 공사현장을 떠나지않고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감독을 계속하자 반대하던 주민들도 지도자의 열성에 감동되어 결국 사업은 횃불작업까지 해가면서 5개월만에 완공되었다.

협동으로 이룩한 경로잔치

해마다 큰 사업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고 무리한 일인줄 알지만 협동으로 이룩한 6천평의 과수원 및 야산개발로 얻은 자신감과 경제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78년에 새마을운동의 구심점을 만들 마을 회관건립에 착수하여 행정당국으로부터 1,300천원의 지원과 자부담3,500천원(지도자500천원, 주민 3,000천원)으로 3월에 착공 5월 8일 어버이날에 단층 스라브 건물 40평을 준공하여 그 준공식장에서 충효사상의 일환으로 경로잔치를 베풀며 효부열녀를 선발하여 시상을 하게되니 주민들이 온통 축제를 벌이게 되었다.

이 회관에서 매년 이러한 경노 및 충효행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회관에 국기게양대를 설치하고 매일 강하식을 실시하여 주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복지농촌으로의 발돋움

이제는 이 마을도 그렇게 걱정하던 모든 부채를 청산하고 복지농촌을 향해 발돋움하고 있으며 농산물시세 정보를 신속히 받아들일수 있는 전화만도 10여대 집집마다 TV와 냉장고를 갖추고 부엌에는 수도꼭지만 틀면 맑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간이급수시설이 되어 있고 영농기계화 추진의 일환으로 바인다 3대, 이앙기 2대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과수병충해방제용으로 18대의 동력살분무기를 가지고 있어 도시 부럽지 않는 부자마을로 발돋움 해가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농외소득 및 과수단지의 퇴비공급원으로 양돈사육장을 확장하고 돼지 자체의 수익성을 불안하나 퇴비증산을 위해 현재의 공동사육 100두를 200두로 확대 사육할 방침이며 농촌 일손부족을 감안, 인력이 적게들고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양어사업을 계획하여 잉어 3만마리를 신청하였고 높아진 주민소득을 타용도에 전용하는 것을 막기 우해 연차적으로 문화 주택80동을 개량할 방침이며 주작목인 사과 보관용으로 저온시설물을 축조하여 적기에 출하 고소득을 얻을 계획으로 되어 있으며 영농기계화를 계속 추진 연내 바인다5대, 이앙기2대를 더 구입할 것이며 협동사업에서 나온 기금을 바탕으로 전마을 학생의 장학화를 추진중이다. 문화복지농촌 건설에 목표를 두고 노력하여 잘 사는 내 공자을 건설할 때까지 많은 땀을 흘릴 것을 굳게 다짐하며 81년도에는 호당소득 5백만원을 기필코 달성하기위해 오늘도 정 지도자는 매진하고 있다.

구습에서 깨어난 천진마을

지도자의 끈질긴 집념

이러한 오랜 전통적인 양반집에서 태어나 어려운 생활속에서 안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철도국에서 10년간 철도공무원생활을 하던 김시억씨는 고향마을 위해 보람찬 개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72년 과감히 공직생활을 청산하고 이 마을에 돌아와 스스로 새마을지도자직을 맡아 강한 집념으로 새마을운동에 앞장서서 과학영농과 경제작물재배, 축산등 다각적 영농으로 자립마을로 이룩해 보고자 결심하였다.

새마을운동을 마을 환경정리부터

새마을운동이 방방곡곡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나날이 발전하는 다른마을에 비해 이 마을은 너무나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애태우던 김 지도자는 마을주민들을 불철주야 찾아 다니며 설득 협동 단결하여 가난에서 깨어나도록 노력을 경주했다.

72년 정부지원 양회300대로 비좁은 마을안길을 넓히기로 하였으나 한치의 땅이라도 양보할 줄 모르는 편협한 주민들은 안길에 편입되는 부지는 물론이고 장애건물 철거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해 있었으나 호소력있는 김 지도자의 집념에 감동하여 주민들이 다같이 참여하여 스스로 담장을 철거하고 편입부지는 회사받아 열심히 땀흘려 일한 결과 진입로 150m와 마을안길 500m가 자동차와 경운기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하여 새마을운동이 조금씩 추진되게 되어 초가지붕 94동도개량하였으며 하수구500m를 설치하는등 새로운 마을발전의 기틀을 조성하면서 주민 협동심을 굳게다져 나갔다.

73년 3월 주민총회를 열고 비만오면 마을앞이 허물어져 왕래가 곤란했던 소하천을 정비하기로 하고 추진위원회를 구성, 사업에 착수하였다. 처음 시작하는 대규모 사업이어서 기술부족으로 공사가 지연되었으나, 4개월만에 사업비 851만원(지원 462만원, 주민부담 389만원)을 투입하여 900m의 소하천을 정비하였으며 74년에는 이 소하천에 암거 1개소 소교량 2개소(30m)를 가설하여 영농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영농개선으로 소득증대

이와같이 마을환경을 깨끗이 개선한 부락민들은 매년 한발에 쓰라린 시련을 겪어오던 천수답 20ha를 수리안전답화 할 것을 계획하고 정부에서 지원받은 1,400만원에 주민부담 650만원을 투자하고 연인원 3,250명이 참여하여 50마력 전동기 2대로 양수장을 설치 가뭄에 시달리던 이 마을 사람들은 처음으로 물 걱정없는 농사를 짓게 되었다. 또한 75년에는 이미 정리된 경지정리구에 도수로 1,500m를 개설하여 관개에 편리하게 하였다.

소득증대사업으로 식량증산에 착안 새로운 영농방식을 배워 증산단지를 조직 모든 영농을 공동작업화 할 것을 결의하고 먼저 신품종재배를 권장 비닐 보온못자리 2ha를 공동집단으로 설치하여 이미 76년에 도내 북부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마을 전면적 재배에 성공하는 기록을 세웠다.

한편으로 객토를 실시해서 반당 1,200kg의 퇴비시용등 지력증진 사업과 병충해 공동방제, 관개수 개선 등 온갖 힘을 기울인 나머지 반당 625kg라는 기록적인 다수확을 이룩하였다.

특히 76년도에는 다수확 단지상을 받은 바도 있고 공동 출하량도 2,400가마니에 3,500만원 소득도 올렸다. 식량증산에 성공한 마을사람들은 다시 소득성이 높은 경제작물 재배를 결의하여 제방을 해 놓고도 버려졌던 하천부지를 개간 사과밭 14ha를 조성하여 작년에는 사과 200톤을 생산하여 3,700만원의 소득을 올렸으며 연초와 고추재배를 실시하여 소득을 올여 연초 10ha의 재배에 1,600만원의 소득을 올렸으며,

고추는 4ha를 재배하여 1,200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또한 조기 수박 2ha를 재배하여 500만원의 소득을 오리는등 다각적인 영농으로 소득을 올렸다.

축산사업으로 고소득

일반 경종방식에 의한 농작물 재배만으로는 획기적 소득증대를 기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된 주민들은 축산사업으로 소득을 높일 것을 결심하고 74년 소를 사육한 경험이 있는 농가에 비육우 14두를 우선 입식시켰으나 첫 출하도 하기전 기술부족으로 농후사료를 많이 먹여 급성 고창증으로 두 마리의 소가 폐사하자 주민들은 실의에 가득찼고 소값을 변상하라는등 이제까지 잘 뭉쳐진 협동심이 분열되고 비육우 사육을 반대하였으나 김 지도자와 추진위원들의 끈질긴 설득과 호소력으로 주민들을 잘 이해시켜 사양 기술교육을 철저히 하는 반면 비육우 사업을 계속 이끌어 나가게되어, 수익성이 점차 높아지자 다시 전 주민이 참여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우형기까지 설치하여 생체량을 측정한 후 판매하는 등 78년에는 130두 사육에 3,000만원의 소득을 올렸다.

양돈에 있어서도 500두를 사육하여 1,200만원의 소득을 올렸으나 78년 말부터 가격이 불안하여 수지면에 고충이 있지만 정부의 수출확대와 계통출하에 희망을 걸고 계속 사육율 확대시켜 나가고 있다.

전문화된 축산마을로 조성하기 위하여 79년에는 공동축사 3동 230평을 사업비 1,540만원(지원 1,000만원 주민부담 540만원)을 투입 연인원 500명이 참여 신축하여 비육우 50두 비육돈 200두를 더 사육하여 연간 5,600만원의 소득을 목표로 전주민이 착실히 추진하고 있으며, 자급사료 수급책을 강구, 잎담배 후작으로 옥수수 3ha와 답2모작 작부체계 개선에 따른 호맥 2ha를 재배하여 자급사료로 충당하고 있다.

부녀자 새마을운동

남자들의 활기찬 새마을운동 추진에 비하여 마을 부녀자들은 양반마을 구습에 보수적이며 오직 전통적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김 지도자는 완고한 교육자의 자부이며 남편을 사별하여 혼자있는 김계영여사에게 부녀회를 조직 회장이 될 것을 권하였다.

그리하여 김 여사는 부녀회장으로서 새마을사업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오랜 세월 동안 울안에 잠겨 양반생활의 인습에 젖어있던 부녀자들을 설득하여 첫 사업으로 집집마다 절미통을 설치하고 절미운동을 실시한 결과, 75년에는 20만원이 저축되었다.

이를 기금으로 새마을회관에 구판장을 설치하고 생활필수품을 공동으로 구입 공급함으로서 근검절약하는 풍조를 일깨우고 허례허식에 잠겨 있는 폐습을 과감히 배격 할 수 있었다.

또한 77년에 부업으로 시작한 비단짜기는 1인당 월 8만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으며 78년에는 660만원의 소득을 올렸고 앞으로 계속 확대 발전시킬 계획이다.

새마을 금고

온 주민이 합심하여 얻은 소득을 공동저축 재투자하기 위하여 명분만 남아있던 금고를 육성 조그만한 돈이라도 새마을 금고에 저축하기로 하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알뜰히 저축한 나머지 금고자산은 1,000만원에 이르게 되어 주민의 소득사업과 사업운영자금에 융자하여 서민금융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상부상조하는 새생활의 실천으로 이제 협동단결하는 새마을 정신의 기틀이 되었으며 매년 1월 15일에는 회원총회를 개최하여 결산보고 및 그해 사업계획을 세우는 알찬 새마을금고가 되었다. 한편 부텨회에서는 구판장 운영 이익금과 공동작업으로 받은 돈을 합쳐 190만원으로 상전 900평을 취득하여, 땀흘려 가꾼 결과 77년에는 잠종 10매를 소잠하여 50만원의 소득을 올려 기금 93만원을 모아 새마을금고에 예치하였다.

문화복지 농촌이룩

76년 전국 새마을지도자대회에서 하사금 150만원을 지원받아 새마을회관 52평을 건립하고 회의실, 이발관, 목욕탕, 구판장 등을 병설하여 다목적으로 활용하므로서 마을 사람들의 복지증진에 큰 도움이 되도록 하였고 77년에는 구판장 운영수입 130만원과 보사부 지원금 300만원으로 간이급수시설을 설치하여 깨끗하고 손쉬운 위생수를 먹게 되어 부녀자들의 일손을 크게 덜어 주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농촌전화까지 17대가 들오와서 도시 농산물 가격조회는 물론이고 어는 곳에도 전화가 가능하게 되어 어느 마을 못지 않는 근대화된 마을로 발전하였다.

또한 주민들의 소득이 높아지고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축적된 여력을 모아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주택개량을 하기로 결정하고 마을 종합개발 계획을 마련하여 우선 하천가에 간이 부럭공장을 만들어 주택용 부럭을 제작하고 한편으로는 공동작업반을 만들어 자재를 구입, 제조 하는 등 치밀한 계획에 꾸준히 추진한 결과 고유의 전통미를 살린 아담한 주택 19동을 건립하여 문화복지 농촌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영농기계화로 복지농촌이룩

지난 8년동안 새마을운동을 꾸준히 실천하여 70년에 22만원에 불과했던 호당 소득이 78년에는 289만원으로 신장되었으며 오는 81년에는 550만원을 목표로 땀흘려 일할 것을 결의하고 있다. 앞으로 이 마을에 바인다 5대 이앙기 3대를 구입 영농기계화로 농촌의 일손 부족을 해결하고 축산을 더욱 발전 시킬것이며 현재 10호에 불과한 가내 공업을 새마을공장으로 유치하여 농외 소득증대에 힘쓰고 주민의 편익을 위하여 도정공장 1동(30평)을 건립하여 마을공동으로 이용함으로서 마을공동 소득을 높여 더욱 더 잘사는 부자마을을 이룩할 것이다.

경북 안동군 임하면 천전지도자 김시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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