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업적

도시 사례

도시 새마을운동 산 교육장

오류1동은 서울역에서 경인간 전철로 25분 거리에 부천시와 접하고 있는 변두리 지역으로서 6,132세대, 29,959명의 주민이 전국 제1의 새마을 금고를 육성하고 도시새마을 운동을 알차게 추진하여 인보협동의 시범동을 이룩하였다. 1961년까지만 하여도 침체된 소도읍형태를 벗어나지 못한채 서울에 채소를 공급하면서 생활을 이어오던 이 마을은 1964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부터 인구가 급격히 증가되고 상가와 공단, 주택등이 밀집된 도시외 각의 개발지역으로 변모되어 도시화 과정에서 생기는 갖가지 문제점이 노출되었을 뿐 아니라 주민의 대부분이 영세상업, 노동 등에 종사하는 저소득층으로서 각박한 인정속에서 협동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곳이 었다. 수백년 낙후의 역사를 떨치고 일어선 농촌새마을운동의 물결이 도시까지 전파되어 이곳에서도 인내와 열설으로 봉사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도시의 어려운 여건을 하나하나 극복하면서, 주민의 신뢰와 참여를 위한 한결같은 노력을 계속함으로써, 이제는 깨끗하고 편리하며 이웃끼리 협동하는 새마을로 발전되었다.
조기회(새벗회)활동 강화

73년초 이마을에서 사람들이 모여 새마을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손쉬운 환경개선부터 새마을사업을 시도했을 때, 주민들은「먹고 살기도 어려운 판에 무슨 공동작업이냐」,「새마을 사업은 농촌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도시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반발과, 무관심으로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처럼 주민의 단합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도시풍토를 안타깝게 생각한 강장석 지도자는 3대를 살아온 이곳 고향 마을의 발전을 위해 앞장설 것을 결심하고 도시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먼저 마을의 지도층인사들과 상의하여 이미 조직되어 있는 조기회를 주민협동의 발판으로 활용키로 하고, 이름은 「새벗회」로 고치는 동시에 회원을 점차 늘려갔다.

새벗회원들은 매일 아침 6시 오류국민학교 교장에 모여 구보, 체조등으로 심신을 단련하는 한편, 아침마다 국기게양과 함께 애국가, 건전가요합창, 국기에 대한 맹세 등을 실천하여 건전한 시민정신의 도장이 되었고,

점차 이웃을 알고 마을의 공동관심사를 논의하는 대화의 광장이 되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계속 참여하여 150여 명으로 회원이 늘어나게 되자, 회원들 간에는 마을을 위해 무엇인가 유익한 일을 해보자는 의견이 모아져 먼저 지저분한 뒷골목의 청소부터 시작하고 출퇴근시에는 교대로 복잡한 거리의 교통정리를 하기도 하였다.

또한 마을에 있는 오류애육원 원아와 회원간에 자매결연을 맺고 저금통장을 마련해 주는 등 지역봉사 활동을 확대해 나갔다.

진입로 개설 및 도로포장

새벗회의 활동으로 주민협동의식이 일깨워지자 주민들은 마을의 공동사업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욕을 갖게 되었으며, 우선 원호병원에서 온수 마을간을 철길이나 산을 넘어 다니던 위험과 불편을 없애기 위하여 진입로를 개설하기로 결의하였다.

11명의 주민이 자진하여 3,000여평의 토지를 회사하여 부지를 확보하고 주민 스스로 연인원 3,000여명의 노력봉사와 2,200만원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협동추진함으로써, 착공한지 여섯 달만에 2km의 진입로를 개설하여 버스까지 연장 운행하게 되었으며 전주민의 땀과 정성으로 이룩된 이 길이야말로 스스로 보람과 긍지를 찾는 의지의 길로서, 이 마을 주민들에게 협동의 교훈을 최초로 깨우쳐 준 새마을의 촉진제가 되었다. 진입로개설을 계기로 이마을 의욕은 점차 높아져 갔고, 골목단위로 환경 개선사업이 주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활발하게 추진되어, 51개소 연장 12km의 안길이 말끔히 포장되고 소하천과 하수구도 깨끗이 정비되었다.

전국 제1의 새마을금고

이와같이 공동참여 의식이 향상되어가자 강 지도자와 새벗회원들은 우리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자금을 조성, 활용할 수 있는 새마을금고를 만들어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자고 결의하고, 1975년 11월, 오류1동 새마을금고를 창립하게 되었다. 강 지도자가 이사장에 선임되고 새벗회간부들이 이사가 되어 회원94명, 출자금 10,000천원으로 3편짜리 비좁은 사무실에서 초라하게 시작한 새마을금고는 실망과 좌절이 점철된 어려움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밤을 새워가며 금고원리를 터득하고 새벽부터 임원들과 함께 각 가정을 찾아 다니며 간고히 출자를 권유했으나 주민들은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저축할 돈이 어디있으며 설사, 돈이 있다해도「무엇을 믿고 돈을 맡기겠느냐」면서 차가운 눈초리로 거들떠 보려하지도 않았고, 밤마다 임원과 새벗회 회원들로 편성하여 주부들에게 새마을금고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냉담한 반응은 여전하여 주민들의 호응을 받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새마을금고육성만이 마을이 하나로 뭉칠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매일같이 시장상인과 공장종업원 등을 찾아 골목 골목을 누비며 순회출자를 받고, 지도층 인사들이 앞장서서 주민에게 권유를 계속한 결과, 창립 3년만에 1,200명의 회원과 5,000만원의 자산을 조성하게 되었으며,

사채에 시달린 영세상인과 어려운 사람들이 신용만을 담보로 이 돈을 대부받아 고리채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 생명을 개척하는 사례가 늘어남에 따라 금고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과 신뢰가 조금씩 높아져 비로소 힘을 얻게 되고 보람도 찾을수가 있었다.

도시서민층 생활에 파고 들어 이사장은 물론 5명의 회계원들이 눈물겨운 열성을 기울인 보람으로 새마을금고는 점차 좋은 성과를 거두어, 한푼이라도 절약하려는 건실한 풍토가 마을에 번져갔고, 금고자산도 날로 늘어나 1976년 4월 1일에는 1억원을 돌파하게 되었다.

이처럼 자금이 늘어나자 강지도자는 구두쇠이사장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종이 한 장, 볼펜 한자루도 아껴쓰는 견실한 운영을 하였고, 은행시간이 지나 들어온 현금을 안전하게 보관하느라 며칠씩 사무실에서 밤을 지새웠으며, 이사들도 교대로 숙직을 하는등 안전관리를 위한 노력을 다하였다.

새마을금고가 주민생활속에 뿌리를 박고 성장하려 하자, 일부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이「마을금고는 선량한 주민들의 돈으로 사채놀이를 하는 곳이다」「이사장 개인사업에 돈을 쓰고있다」는 등 터무니 없는 모략과 관계기관에 투서를 하고, 가족들도「한 푼의 보수도 없이 무엇 때문에 남에게 욕까지 들어가면서 일하느냐」고 만류했을 때 울고싶은 심정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나, 그때마다 강지도자는 내 한몸 희생되어도 새마을 금고만은 성공시키고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일어서서 거리에 홍보판을 내걸고 주민을 설득하였으며, 그 운용에 있어서도 세심한 주의를 다하여 여신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건전한 용도에 한하여 꼭 필요한 회원에게만 공정하게 대부를 해주었고, 법인설립인가를 받아 공신력을 확보하였을 뿐만아니라, 금고의 운영상황을 수시로 공개하는등 의심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나갔다.

새마을금고로부터 자금을 대부받아 자활의 터전을 이룩한 주민의 수가 날로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지역내의 중소기업체에 운영비를 대부해 주어 자금난에 허덕이던 기업이 활기를 되찾은 경우도 많다.

이처럼 새마을금고가 주민생활속에 뿌리를 박고 저축의욕이 불붙게 되자 강 지도자는 이를 더욱 확산시키기위해 관내 모든 학교에 새마을금고 창구를 개설하였다. 어린 학생들이 용돈을 절약하여 알뜰하게 모은 동전만도 하루에 650천원을 넘게 되자 이를 본 어른들도 새로운 감동을 받았으며, 이것이 새마을금고 고성장의 또 한 번의 전기가 되었다.

이처럼 어린이에서부터 주부에 이르기까지 한마음으로 참여한 새마을 금고는 창립년째인 1977년말에 12억원을 넘는 경이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고 진정한 마을의 은행으로 주민생활 속에 깊게 뿌리를 박게 되었다.

새마을금고가 대형화되어 하루 거래회원이 평균 800명이 넘고 거래액이 3억원에 달하자 3층건물의 새 사무실을 마련하여 철제금고와 비상벨을 설치하고 도난보험, 화재보험에 가입하는 등 안전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또한 회계원도 22명을 공채하여 1개월간 자체 기초교육과 새마을금고연합회 중앙교육을 이수케하여 업무능력을 향상시켰으며, 보수도 은행수준에 못지않게 지급함으로써 사기를 높여 주었고 이사장이 아침마다 새마을 정시교육을 실시하여 친절한 봉사자세를 잃지 않도록 하고 있다.

매년 1월에는 대의원총회를 열어 전년도 업무결산과 앞으로의 사업계획을 확정하고 새 임원을 선출하여 신임을 받게 함으로써, 회원의 총의에 따른 새마을금고가 되고 있으며, 회원 모두에게 출자액과 배당금을 일일이 통지하여, 저축에 대한 새로운 의욕과 보람을 증진시켜 주고 있을 뿐아니라 창립이래 지금까지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금고문을 열어 주민이 필요할 때 언제라도 새마을금고를 찾도록 하고 있다.

경노회관 건립

주민들의 호응과 지속적인 노력으로 기반을 굳힌 새마을금고는 이익금도 계속 불어나 회원에게 년 24%의 배당을 하고도 여력이 생기자 주민들이 갈망하던 경노회관 건립에 착수하게 되었다.

적립금 5천만원을 투입하여 77년 11월 준공한 건평 171평의 경노회관은 경노당, 도서관, 마을회의실을 갖추어 주민복지와 협동의 새로운 광장으로 등장하였다. 회관 1층에 각종 오락시설을 갖춘 경노당이 생기자 노인들이 즐거워함은 물론, 마을의 며느리들까지 새마을금고 덕분에 효도하게 되었다고 기뻐하고 있다.

또한 국민학교 어린이들이 경노당에 찾아와 할아버지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흐뭇한 일이 자주 있으며, 노인들은 우리가 물려준 것은 가난밖에 없는데 자식들이 고생해서 모은 돈으로 지어준 경노당을 오래도록 깨끗이 사용하자고 다짐하고 있다. 또한 자식들의 효심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무엇인가 봉사하고 건설적인 활동을 해보자는 의견이 모아져 1년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뒷골목 청소에 참여하고 공동약수터를 정화하며 노인대학에 열심히 참여하는등 새마을운동에 앞장 서고 있다.

회관의 지하 57평에는, 108석의 좌석과 3,500권의 도서를 비치한 도서실을 마련하고 무료로 개방함으로써 마을의 공부방이 되고 있으며,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2층의 다목적 회의실은 각종 마을행사와 새마을교육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비싼 예식장을 찾던 주민들이 생각을 바꾸어 금년 봄에만도 여덟 쌍의 부부가 이 회의실에서 결혼식을 갖기도 하였다.

경노회관 건립은 새마을금고에 대한 주민들의 의식을 변혁시키는 계기가 되어 매월1억원이상의 증가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대부분 어려운 사람이 살고 있는 이지역에서 10억원 조성이 한계라고 생각되어던 자산은 79년 8월말에는 32억5천만원으로 늘어 났으며 관내의 공장, 종업원, 상인, 학생들까지도 가입하여 31,700명을 확보함으로써 명실공히 전국제 1의 새마을금고로 성장하게 되었다. 한편 새마을금고를 착실하게 운영함으로써 78년 경산결과 1억8천2,000만원의 수이익을 올려 그중 1억 5천 100만원을 회원에게 배당하였으며 각종 복지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적립금을 늘려 나가고 있다. 지금까지의 적립금총액은 67,000천원에 달하고 있으며 또한 회원이 늘어나고 사업이 확대됨에 따라 1977년 3월부터「월간 새마을금고 소식」을 발간하여 새마을금고 운영상황을 일일이 공개하고, 여러 가지 생활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청소 발대식과 향토 문화재

78년 10월에는 주민복지 증진을 위한 지역사회 사업으로 구청에서 해주던 쓰레기 청소를 새마을금고에서 주관하기로 결의하여 적립금 19,400천원 투입, 최신현 프레스청소차 한 대를 구입하고 수하차 일곱 대, 청소원 여덟 명을 새마을 금고예산으로 확보하였다. 새마을금고에서 청소사업을 주관한 이후, 주민들은 "우리돈으로 차를 사서 우리 힘으로 마을 청소를 해나간다"는 보람과 긍지를 갖고 구청에서 청소할 때 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로 청소에 참여하고 있다. 한편 새마을금고에서는 원호대상자와 철거민이 대부분인 온수연립주택 새마을자립회에 버스구입자금 15,000천원을 대부하여 3,600여 주민의 교통난을 해소해 주었으며, 해마다 10월에는 회원총회를 겸한 새마을 향토문화제를 개최하여, 각종 민속행사 및 효자효부표창, 노인 및 영세민에 대한 무료진료도 실시했다.

마을 공동구판장 설립

79년 5월 9일 4월중 경제동향보고시 박대통령께서 마을단체표창을 하시고, 하사금 7,000천원을 주셨으며, 이 자금으로 79년 7월 4일 시장내에 마을 공동구판장을 설치함으로써, 마을내 기존 유통기구에 해를 주지 않고 상호 경쟁자의 위치에서, 상호 조정자의 위치로, 판매위주보다 물가 안정방향으로 유도하여 국가가 추구하는 유통구조개선과 물가안정, 소비자 보호운동을 도시에 성공시켜 마을의 정신적 구판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계획

이러한 성공사례가 널리 알려지자 전국에서 새마을지도자, 관계공무원, 기업인등 12,000여명이 이곳을 찾아 도시새마을을 배워감으로써 오류1동은 새마을운동의 산 교육장이 되고 있으며, 앞으로 오류1동 주민들은 새마을금고를 인보협동의 모체로 주민소득의 원천으로 근검, 저축의 도장으로 더욱 내실있게 운영하여 회원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한편, 장학기금 2억원조성, 주민복지사업을 알차게 추진해 나갈 것이다.

서울 영등포구 오류1동 지도자 강장석

가난의 한 이렇게 벗었다.

대전시 남구 변두리에 위치한 문창 2동은 주민 대부분이 날품팔이 또는 행상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영세한 동으로서 주민 60%가 남의 집에 세들어 살고있어 시내 47개 동중에서 재산세 부답세율이 가장 낮은 아주 가난한 마을로서 학교나 병원, 여관 기타 어린이 놀이터등 문화 시설이 전혀 없는 낙후되고 빈한한 지역이었다.

주민 대부분이 월 5%이상의 비싼 고리채를 빌려 써야하는 이곳 영세한 주민들은 생활 의욕을 잃고 대낮부터 윷이나 음주로 소일하는가 하면 이집저집으로 옮겨다니며 도박도 서슴치 않고 툭하면 싸우기 일수였다. 한마디로 3등 인생들이 모여사는 어지러운 마을이었다.

퇴폐한 생활 그대로를 반복하며 서로를 불신하고 상호 갈등으로 살벌한 생활을 하여가는 주민들을 보다 못한 문창 2동 지도자 이장호씨는 놀지않고 부지런히 일하면 다른 마을과 같이 잘살는 마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결심하고 동장과 마을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1977년 3월 15일 조그마한 사무실을 임대내어 회원 35명으로 자산 45만원을 모아 문창 2동 새마을금고를 창립했던 것이다.

우선 봉사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유관 기관과의 유기적인 협조를 갖고 회원모집에 불철주야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으나 약1년 전부터 창립을 본 회원6백여명에 자산 1억 8천만원의 남대전 협동조합과 천주교도를 중심으로한 자산 1억의 문창 신용협동조합이 이미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금고를 설립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민들은 남대전 협동조합과 문창 신용조합이 있는데 무엇하러 새마을금고를 새로 설치하느냐며 아예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지도자 이장호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주민들이 출자한 자금은 주민에게 분배되며 마을을 위하여 사용 된다는 것을 누차에 걸쳐 설득한 결과 회원이 늘게 되고 비협조적이던 주민들이 조금씩 마을 금고에 출자하는 성의에 힘입어 어떻게 하면 회원들의 자산을 늘려 바람직한 새마을금고를 만들 수 있을가에 전념하게 되었다.

끈질긴 집념으로 5억을 돌파

회원들의 편익을 조금이라도 더 보장해주고 봉사 태도를 확고히 하면 새마을 회원 참여와 자금조성에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주민들의 애경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하여 같이 슬퍼하고 같이 즐거워 하는등 상부상조의 생활태도를 가짐으로써 주민들과의 인간적인 유대를 한층 더 강화해 나갔던 것이다.

또한 매월 실시하는 반상회를 순회하면서 새마을금고에 대한 홍보에 전력을 다하고 예비군 훈련시에도 30분씩 시간을 할애 받아 회원 가입을 호소하여 많은 성과를 얻게되었다.

가정에는 가훈이 있듯이 동에도 동훈을 만들자고 주민들에게 제의하여 문창2동 동훈을"한가정 한 통장 갖기"로 정했으며 통별로 경진대회를 열어 선의의 경쟁 의식을 갖도록 노력했다.

이사회를 열어 금리를 조정하고 단 하루를 예치하더라도 이자를 계산해주는 마을 예금제도를 신설하였으며 영세민의 고리채를 없애기 위해 가난한 주민 위주로 1백만원 이하는 신용 대부해 주는 혜택을 주기 시작했다.

일수놀이를 없애기 위해 일일적금제도를 신설 10만원 대출시 고리채보다 1만5천원을 적게 받는 편익을 주민에게 주어 일수놀이도 근절시켰던 것이다.

또한 마을금고 임직원들은 친절과 봉사로써 근무에 임하고 타 금융기관 보다 한시간 먼저 문을 열고 두시간 늦게 문을 닫는 자세로 주민을 위해 봉사했으며 관내 50여개의 자생조직 대표자와 개별적인 접촉으로 회원을 흡수하는데 성공하여 77년 결산 결과 3천여명의 회원과 자산금 2억을 돌파하여 도내 시범 새마을금고로 발전하게 되었다.

새마을금고를 주민 복지사업에

이제 회원 6천8백여명에 자산금 9억을 돌파한 문창2동 새마을금고는 충효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매년 효부 효녀4명을 선발 표창했고 1인당 2만원씩을 상금으로 전달했으며 30평의 노인회관을 건립 45명의 노인들에게 안식처를 마련하였음은 물론 년 3회25만원을 들여 경노잔치를 베풀고 연간 37만원의 운영비를 지원 연탄을 공급하고 장기 바둑 등 오락시설을 갖추어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도록 하였다.

건평 40평의 공동구판장을 마련하여 1천5백만원을 투자 가전제품1천여종 및 생활필수품을 판매하여 중간 상인의 이익을 회원들에게 돌아갈 수 있게 하였다. 또 2.5m/t의 화물자동차를 구입, 구판장 상품을 직접 운반 비용을 절감하고 회원들의 이삿짐 운반과 연료파동에 대비 연탄 판매허가를 얻어 연탄을 싼 값으로 운반 공급해 주고 있다.

마을금고 회원들의 노고에 보답이라도 하는 듯 구판장은 주민들이 적극 이용하여 이제 1일 매상 3십여만원 연간 1천 2백만원의 순수익이 회원들에게 고루 배당되게 되었다.

어린이 예금창구를 개설하여 어린이들의 저축심을 길러 주는가 하면 매주 수요일에는 관내 문창국민학교에 직원이 파견되어 예금 수납업무를 취급하고 저축실적이 우수한 학생 150여명을 선발 시상하여 저축 의욕을 높여 주고 있다.

3천여권의 책을 비치한 독서실을 마련하여 언제든지 학생들이 이용할수 있도록 개방하고 어린이 놀이터를 설치하여 어린이들이 활달하게 놀수있고 신체단련에도 도움을 줄 수 있게 하였으며 회원의 자녀들중 성적이 우수하나 가난하여 진학을 못하는 모범학생 55명을 엄선하여 144만원의 장학금을 분기별로 지급해 주기도 하며 새마을 학교를 개설 노인반 부녀반 청소년반으로 구분 새마을 정신교육을 실시 4백 8십명을 수료시켰다.

도시 새마을 사업으로는 휴지통 30개 이동식 화단 50개소를 설치 도시 미관은 물론 밝고 명랑한 거리를 조성하고 주민 숙원사업인 하수구 120m를 설치하는 등 크고 작은 사업을 마쳤다.

회원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한편 점진적으로 지역사회 개발에 참여하여 공과 사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찾아와서 상의하면 불편없이 도와주는 새마을금고로 만들어가고 있다.

한가정 한통장 갖기에서 한사람 한통장 갖기로 동훈을 바꾸고 착실히 성공하고 있어 79년도 하반기에는 10억을 무난히 돌파하리라 확신한다.

복지 마을을 향해

90평의 현대식 건물에 아담하게 사무실을 꾸미고 16명의 직원이 성심껏 일하고 있는 문창2동 새마을금고는 7천원의 순이익금으로 25%에 해당하는 4천여만원을 회원에게 고루 배당하고 나머지 3천만원중 1천만원으로 청소차 1대를 구입 청소업무를 대행 주민의 편의를 제공할 방침이다.

또한 1천여 만원으로 지저분한 하수구를 다시 개수하고 비포장된 마을 안길을 포장하여 명시공히 깨끗한 마을을 만들고자 한다.

80년도에는 7백여만원의 장학금을 마련 전 회원의 자녀가 중 고등학교를 장학금으로 다닐수 있게하여 백년대계를 이어받을 역군을 길러내는 교육사업에 투자할 계획이며 현재 새마을금고 사무실을 증축하여 지하에는 새마을공장을 설치 유휴 노동력을 흡수 소득증대에도 힘쓰고 2층에는 새마을예식장을 만들어 무료로 대관함으로써 회원은 물론 영세민들의 부담을 줄여 가정의례준칙도 이행토록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계획이다.

이제 문창2동 새마을금고는 이사장 이하 임직원 전원이 하면 된다는 신념을 갖고 새마을금고를 모체로 굳게 뭉쳐 80년대에는 전국 제일가는 새마을금고를 만들기 위하여 회원 전체가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충남 대전시 중구 문창2동 지도자 이장호

페이지 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