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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

출생에 읽힌 이야기

박정희는 청소년기를 통하여 바로 위의 누님인 박재희(朴在熙)와 가까이 지낸 셈이다. 그리고 박재희는 동생 정희의 출생과 죽음을 직접 목격한 유일한 동기간이다.

박정희의 탄생에 대하여는 갖가지의 일화가 있으며 그 일화 속에는 토속적인 면이 많다. 왜냐하면 박정희가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나이 46세, 어머니가 45세로 며느리까지 둘씩이나 봤고 또 큰딸은 출가하여 임신을 하고 있었으니 모녀가 함께 출산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 시대만 하더라도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하였으니 사람이 70세를 사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60세 회갑을 맞이하면 오래오래 살았다고 자손들이 축하연을 베풀어 동네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하나의 풍습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남녀 40세만 되면 벌써 허리가 꼬부라지고 장죽을 물고 다니면서 노인행세를 하던때에 새삼스레 또 아기를 가졌으니 낭패를 당한 셈이다.

첫째, 며느리, 딸들과 함께 해산을 하게 되었으므로 식구들에게 어른의 체통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동네사람들 보기가 민망했을 것이며 스스로 부끄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셋째, 어려운 살림에 식구 하나라도 더 느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스러운 일이 못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어머니는 낙태라도 시켜볼까하여 여러가지 방법을 썼던 것이다. 당시의 사정에 대하여 박재희의 증언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며느리들까지 보신 어머님이 동생을 임신하셨을 때는 귀희(貴熙) 언니가 형부 은용표(殷龍杓)씨와 결혼하여 임신중에 있었습니다. 언니는 동생을 낳은 해에 딸을 낳았지요. 그러므로 어머니는 딸과 함께 아기를 밴 것을 퍽 부끄럽게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때는 또 집안이 원체 가난하여 식구가 하나 더 느는 것이 큰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기를 지우려고 무척 애를 썼습니다. 시골사람들이 흔히 쓰는 방식대로 간장을 한 사발이나 마시고 앓아 누우시고, 밀기울을 끊여서 마셨다가 까무라치기도 했답니다.

섬돌에서 뛰어내려 보기도 하고, 장작더미 위에서 곤두박질 쳐보기도 했더랍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수양버들 강아지의 뿌리를 달여 마시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대요. 한 대여섯 날 만에 건강을 되찾았는데 뱃 속의 아기가 놀지 않더랍니다. 이제 됐구나 하곤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니까 또 놀더래요. 그 뒤 어머니는 일부러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다 대고 뒤로 자빠져버렸어요. 낙태를 시키려고 스스로 방아에 깔려버린 것이지요. 그때 나는 다섯 살이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어머니가 죽는다고 울고불고 했답니다.

어머니는 허리를 못 쓸 정도로 다치셨는데 뱃속 아기는 여전히 놀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고 아기가 태어나면 이불에 돌돌싸서 아궁이에 던져버리라고 작심하고 아기 지우는 일을 포기했답니다.

동생이 태어나던 날도 저는 혼자 마당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한참 만에 방문을 열어보니까 어머니는 이불을 덮어쓴 채 끙끙 앓고 계셨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또 아기 지우는 약을 먹고 그러시는 줄 알고 겁이나서 아버지를 찾으려 우리 논으로 뛰었습니다.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꽃신을 신고 달려가다가 돌밭에 넘어져 상채기가 났습니다. 나는 피가 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숨이 차서 헐떡거리니 나락을 베고 계시던 아버지가 보시고 얼른 논에서 나오시더니 대님을 풀어서 저의 상처를 동여맨 뒤 나를 업고 집으로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혼자 아기를 씻어 옆에 뉘여놓고 당신도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아기가 새빨갛고 꼬물꼬물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는 젖꼭지가 말라붙어 동생은 모유 맛을 모르고 자라났습니다. 밥물에 곶감을 넣어 끓인 멀건 죽 같은 것을 숟가락으로 떠 먹였습니다."


이상의 증언에서 보듯이 박정희의 출생은 매우 극적이면서도 숙명적이라고 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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