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인간 박정희

신천지를 찾아서

박정희의 머리 속에는 하나의 지워지지 않은 신천지(新天地)가 있었으니 그것이 곧 만주(滿洲)땅이다.

그가 만주 땅을 처음 밟아 본 것은 1935년 5월의 4학년 수학여행 때이다. 학생들은 2주간에 걸쳐 봉천, 대련, 여순, 신경, 하얼빈, 갈림, 무순지방을 기차로 여행했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평야와 지평선 뒤로 떨어지는 장엄한 석양은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박정희는 어려서부터 군인이 되기를 희망했고, 언제가 고향의 선배인 강재호(姜在浩)가 만주군 장교의 계급장을 달고 박정희 앞에 나타난 적이 있다. 그는 강재호로부터 만주군관학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기도 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정책이 강화되면서 박정희 교사의 마음은 울분과 갈등으로 끝없는 방황이 계속되었다. 그 무렵에 마침 일본인 시학(장학사)과 교장으로부터 머리가 길다는 질책을 받고 평소의 울분을 폭발시켰던 것이 만주행을 결심하게 된 동기이다.

그러므로 당시 동료교사로서 박정희의 교사시절을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던 권상하(權尙河)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그때 상주(尙州)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군(郡)은 달라도 박정희가 근무하던 문경보통학교까지는 4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일요일만 되면 서로 하숙집을 오가며 만났다. 1939년의 10월인가 11월경이다. 그가 나한테 놀러왔다가 간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화요일이 나 수요일쯤이다. 내가 6학년의 오후수업을 하고 있는데 누가 복도에서 창을 똑똑 두드려 나가보니 박정희였다.

국민복을 입은 채 멀쑥하게 서 있는 그의 신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나도 얼른 말을 못하고 멍멍히 서 있었다.

"수업이 언제 끝나는가!"
"한 삼십 분 있으면 되네"
"그럼 내가 저기 운동장 나무 밑에서 기다림세"
"그러게! 마치고 곧 감세"

나는 수업을 마치고 박정희가 있는 나무 밑으로 갔다. 그가 들고 온 가방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이부자리 등 큰 짐은 버스 정류장에 맡겨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는 사표를 내고 나온 길이라고 했다. 나는 그와 함께 나의 하숙집으로 와서 또 밤이 새도록 술을 드리마셨다.


박정희는 그때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교사들은 군대식으로 머리를 빡빡 깎게 되어 있었는데 그는 장발이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도전이요 반발이었다.

이틀 전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는 연구수업에 대한 발표가 있었고 도(道)에서 데라도(寺戶) 시학(장학사)이 시찰을 나왔던 것이다. 그는 강평하는 자리에서

"아직도 총력정신이 결여된 교사가 있다. 이것은 황민화(皇民化)의 정책에 순응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하고 박정희 교사를 겨냥하여 비판했다. 그날 밤 아리마(有馬)교장의 사택에서 시학을 위한 술자리가 있었다. 물론 교사들도 초대되었다. 그 자리에서 또 박 교사의 두발문제를 다시 거론하자 그는 시학과 교장을 상대로 언쟁을 벌이다가 술잔을 던지는 등 소란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리마 교장은 박 교사를 교장실로 불러 질책을 한 다음 데라도 시학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던 것이다.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한 박 교사는 모욕감을 참을 수 없어 울컥하고 말았다.<조선인>주제에 너무 건방지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 교사의 주먹이 아리마 교장의 면상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평소에 쌓이고 쌓인 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만 것이다. 그리곤 사표를 써던지고 곧장 나를 찾아 왔던 것이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막막하이. 부모님한테는 이야기할 수도 없고...... 그런데 전에 우리학교 배속장교인 아리가와(有川)대좌 알지?"

"응!"

"실은 졸업 후에도 편지 왕래가 가끔 있었어. 그 분은 지금 만주 관동군부대의 지휘관으로 있는데 거기로 한 번 가볼까 해"

"아리가와가 널 무척 사랑했지"

이렇게 해서 박정희는 약 3년 동안의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마감하고 스스로 군인의 길을 찾아 북만주(北滿洲)로 향했다.

페이지 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