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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

20세의 젊은 교사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리하여 4월 1일 문경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갓스무살의 젊은 나이에 월급45원을 받는 선생님이 되어 사회의 첫출발을 하게 되었으니 집안에서는 무엇보다도 가난을 좀 면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적지 않았고 구미 일대에서는<개천에서 용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교육은 인격을 완성해 가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서는 ①튼튼한 몸 ②밝은 지식 ③아름다운 마음씨를 길러 줘야 한다는 것은 박정희가<교육학>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박정희 교사는 본래 운동하기를 좋아했다. 체조에는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체육시간에는 더욱 흥미 났다. 달리기, 철봉, 뜀틀, 멀리뛰기, 맨손체조 등을 위주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씨름, 기마전, 축구 등 시합도 시키고 체육훈련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그가 학교에 부임하고 나서 몇 달 뒤부터는 가끔 아버지가 찾아왔다. 늙고 병든 아버지로서 첫째 자식이 보고 싶기도 했고 둘째 술좋아 하는분이므로 용돈이 궁하기도 하였으며 셋째 장가를 가고도 제 처를 돌보지 않는 자식을 타이르기 위해서였다.

박 교사는 그때 월급 45원을 받으면 하숙비8원, 가난한 집 아이들의 월사금으로 2~3원(1인당1원씩 2~3명)을 지출했다. 그리고 본인의 용돈으로 약10원을 쓰고 나머지는 상모리 집으로 송금을 했다.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온 데는 세 번째가 가장 큰 이유이다. 하기 싫다는 결혼을 억지로 시켜 놓았더니 제 식구를 데리고 가서 살림할 생각은 꿈에도 없는 것 같고, 하숙집에만 틀어박혀 집에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가끔 아들을 나무라기도 하였다. 그럴수록 박정희는 아내가 더욱 싫어지기만하여 여름방학 때나 겨울방학 때도 아내가 있는 상모리 집에는 가지 않고 밖에서만 얼씬거렸다.


그러다가 교사로 부임한 지 1년 만인 1938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당시 아버지의 병은 깊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따로 살림을 내어 오손도손 살기를 바랬지만 그 소망은 이룩되지 않았다.

한 번은 아버지로부터 송금(送金)은 필요 없으니 너의 처와 동거(同居)하기를 바란다는 간곡한 편지가 온 적도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 박정희의 마음도 착잡하였으나 당시로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했다. 젊고 패기 만만했으며 반골정신이 농후했던 박정희 교사는 나날이 울분을 참지 못했다.


그리하여 학생들에게 사범학교에서 배운 대로 은근히 민족혼을 일깨워주는 말을 자주했다. "학생 여러분! 전세계를 얻는다 할지라도 민족이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죽는 길밖에 없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20세기의 후반기가 된다. 우리는 남을 이길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하면서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의 제자 이영태(李永泰)의 증언이다. 그는 사범학교에서 배운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가르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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