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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

엄격한 기숙사 생활

사범학교는 교사사관학교(敎師士官學校)라고 할 만큼 학칙과 규율이 엄격했다. 전 학생을 기숙사에 머물게하여 24시간 교육과 훈련 감시로 일관했다. 교과서 이외의 책은 학교당국의 검열도장을 받지 않으면 읽을 수도 없고 특히 금서(禁書)를 읽다가 퇴학 당하는 학생이 많았다.

그러므로 100명이 입학을 해도 졸업은 대개70명선에 머물렀다. 주로 금서를 읽다가 쫓겨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여학생과 연애를 해서도 안되고, 술·담배를 해도 안 되며, 무단결석, 조행이 나쁜 학생은 가차없이 퇴학처분을 내렸다.

특히 조선인과 일본인에 대한 민족차별이 심했다. 한국인 학생들은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방학 때는 집에까지 고등계 형사들이 수시로 찾아와서 독서경향이나 언동까지 조사하여 가혹한 통제와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 반면에 일본인 학생들은 도서검열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기숙사의 급식도 일본인은 쌀밥에 잡곡을 약간 섞는 정도인데 조선인은 잡곡에 고구마를 섞어주는 급식을하여 변비가 생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졸업 후에는 봉급도 60퍼센트나 일본인이 더 받는 차별정책을 썼던 것이므로 가장 감수성이 예민할 때 그와 같은 민족차별의 실상을 체험했던 학생들은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따라서 박정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박정희는 일본인 상급생에 대하여 경례조차 잘 하지 않았고, 졸업할 때의 사진첩에도 일본의 연호(年號)인 기원(紀元)을 쓰지 않고 단기연호(檀紀年號:4270년)를 썼다하여 말썽이 된 적도 있었다.


1930년대는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이므로 사범학교의 교육환경도 이에 따라 더욱 강화되어 갔다. 그러므로 교련이 다른 과목이나 학교보다 훨씬 심하게 부과되어 준사관생도(準士官生徒)나 다를 바없었다.

현역군인인 대좌(대령)가 교련 책임자로 부임했던 것인데 대구사범학교의 책임자는 아리카와(有川)대좌였다. 그는 일본 육사(陸士)와 육군대학을 나온 엘리트 군인으로서 일본인들까지도 멸시하는 콧대 높은 인물이었다.

아리카와는 서열이 교장 다음으로서 학생들 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그의 감독하에 있었다. 그런데 그 아리카와가 박정희를 좋아했고 또 박정희도 그를 좋아했다. 왜냐하면 박정희는 교련과목에 출중했던 것이다.

몸집은 작지만 날쌔고, 구보, 사격, 검도, 총검술, 구령, 동작 등에서 뛰어났다. 그러므로 아리카와는 교련시간 때 박정희을 불러내어 동작의 모범을 보이는 교련조교로 부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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