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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

문경의 하숙 생활

박정희 교사는 학교 바로 밑에 있는 김순아(金順牙)라고 하는 아주머니 집에서 하숙을 했다.
그는 남편을 잃고 임창발(林昌發)이라는 아들하나를 데리고 하숙을 치며 사는 여인인데 인정이 많고 성격은 남자처럼 호탕한 편이었다.

박 교사가 하숙에 든 다음 달에 문경군청의 농회(農會)기사인 허동식(許東植)이 하숙생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한 집에서 하숙을 하다보니 친하게 지냈고 퇴근 후면 술친구가 되었다. 당시의 생활에 대하여 허동식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왔다. 박 교사의 첫인상은 꾀죄죄했는데 눈빛만은 빛나고 다부진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곧 친숙한 사이가 되었고 매일 집에서 술을 마신 것 같다. 술마신 것이 기억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걸리를 동이로 받아와서 쪽박을 띄워놓고 허연 배추속과 된장을 안주 삼아 밤새도록 마셔댔다.
하숙집 주인도 가끔 끼어들고 했는데 박정희는 평소에 말이 없다가 술만 한 잔 들어가면 <왜놈들> <왜놈들>하면서 일본인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리하여 이순신(李舜臣)이나 나폴레옹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호탕하게 웃기도 했다. 노래는 <황성옛터>가 십팔번이고 방학 때도 집에는 가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한 줄은 전혀 몰랐다. 집안 이야기는 도통 꺼내지 않았다.

그는 늘 스파이크를 갖고 다니며 애지중지했고 아침 6시에는 학교 운동장에 올라가 어김없이 나팔을 불었다. 시계가 없던 시절에 이 나팔소리가 들리면 문경사람들은 "야! 박 선생 나팔소리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다"하고 일어날 정도였다.

그때 박 교사가 특별히 책을 많이 읽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저 술만퍼마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하숙집 아주머니는 박 교사한테는 꼼짝 못하고 생선을 사면 그에게 몸통을 주고 나한테는 꼬리만 준다고 내가 핀잔을 주기도 했다. 당시 문경군청 서기로 있던 이동년(李東寧)도 가끔 어울려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박 교사는 누구보다도 대일감정(對日感情)이 좋지 않았다. 말끝마다 <왜놈들>이 튀어나왔으며 의식적으로 일본말을박정희의 친필 통지부 회피하는 눈치가 역연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그 새끼 때려 죽이려다가 놔주었다. 왜놈이면 다여!"하면서 아리마(有馬)교장을 패주고 와서는 씩씩거리는 것을 보았다.

임창발(林昌發)은 박 교사보다 한 살 아래였다. 그러나 때로는 눈에서 눈물이 핑 돌도록 호되게 꾸짖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극히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친동기간이나 다름없이 허물없이 지냈다. 그래서 박 교사는 만주군관학교 시절에도 휴가 때는 문경하숙집에 들려 오래도록 묵어갔다.

그러므로 1969년에 옛 하숙집 아주머니였던 김순아가 죽었을 때 박대통령은 임창발에게 친필 위로편지를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30년 전 문경 재직시에 피몽(被蒙)한 갖가지 후의를 다시 추억하게 됩니다. 문경선(聞慶線)개통식에 참석하려다가 급한 용무가 있어서 불참했는데, 모친께서도 오래간 만에 나를 만났으면 하고 기다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편지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공(公)과 사(私)를 분명히 하는 사람이었다. 옛날의 은인을 잊지 않으면서도 쓸데없는 은혜를 베풀지는 않았고, 아무리 바쁜 중이라도 정중한 인사만은 빠뜨리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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