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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

가계

가계도

박정희 집안은 고령 박씨 성주파(高靈朴氏星州派)이다. 이조 초엽에 17대조가 능참봉판(陵參奉判) 사제감사(司宰監事)를 지냈고 18대조가 현공(縣公 - 외관직문관 곧 현의 원) 그러다가 19대조에 와서야 문과(文科 - 10년마다 병년에 문관의 당하관에게 보이던 과거급제) 벼슬을 했을 뿐 줄곧 열 일곱 대가 내려오도록 벼슬 한 자리 못했다. 그의 고조(高祖)대부터 조부(祖父)대까지는 계속 3대가 독자로 내려오다가 선친 대에서는 3형제가 되었다.
그의 선친 성빈옹은 이조 말엽에 향사(鄕士 - 시골 선비로 영농을 하던 무사)로써 무과 벼슬을 받고 한때 영월 군수를 지냈다. 엄친 박성빈 옹은 원래 성질이 강팍하여 눈에 서슬이 서 있고 비위에 거슬리는 일에나 타협을 앞세우는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끝장을 봐야하는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그는 또한 혈기 방장 30대에 나라 되어가는 꼴을 크게 개탄하여 분김이기도 했겠지만 두주(斗酒)를 삼가지 않았다. 세상은 물끊듯이 요란하고 인심은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 가는 때이라 은사의 기풍을 그대로 지킬 때가 아니었다.
때는 1890년대 척신(戚臣)정치의 부패가 그 극에 달했다. 벼슬아치나 한다는 작자는 그 자리에 앉으면 그 밑천을 빼기 위해 지방 고을에 가서 몇 갑절의 토색을 농민층에다 부담을 시키는 바람에 원성은 하늘에 사무쳤으며 이렇게 주구(誅求 = 관가에서 백성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음)하니 농민들은 살 수 없다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섰다. 구호는 보국안민 박 성빈 옹 또한 정의의 기치 아래 호흡을 같이한 무명의 용자이기도 하다. 한편 당대는 5형제나 된다. 그러니까 7남매를 낳아서 기른 성빈 옹의 장자 동희 씨는 한 세전지재물 (世傳之財物)인 농자천하지대본의 유산을 이어받고 영농을 하고 있었다.
슬하에 남매가 있었으며 그의 성격은 언제나 맏형 다왔고 수수한 옷차림에 너그러운 표정을 지었다.
남들은 말하기를 좋아서 동생을 잘 뒀으니 이제는 고생문을 닫게 되었다고 하지만 동생의 덕이라고는 조금도 보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신조처럼 되어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숭조상문(崇祖尙門)의 예문에 오대봉제사(五代奉祭祀)는 장자 장손이 맡기로 되어 있다.
이 곳 금오산 기슭의 온수골 산중턱에 모신 선영이 있다. 이 고장은 선산 발치에 있으나 아우 정희 씨도 일 년에 한 두 차례 고향을 찾았으며 지난 63년 10월에 제3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그의 부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금의환향하였을 무렵에 선영을 찾은 그는 오징어포, 사과와 밤, 그리고 통닭 한 마리 네 가지의 소박한 제물을 차려 놓고 약주잔을 재배하고 감회 어린 눈물을 지었던 것이다. 둘째형 무희 씨는 수 년 전에 운명하였고 넷째 형 한희 씨가 있었으나 요절하였다. 이들 형제들은 모두 출중했는데 그 중에서도 뛰어난 자질을 갖춘 형제는 상희 씨와 정희 씨였다.
상희 씨는 옛날 보통학교를 마칠 정도의 학력이었으나 워낙 독실하게 배웠기 때문에 문학에 조예가 있어서 언론계에 투신하여 활약하다가 6·25동란 전에 참사를 하고 그 유가족은 2세의 교육을 위해 대구에서 외로이 떨어져 살고 있었다. 자매로는 손위의 누이가 있고 맏누이는 칠곡 약목 은씨 가문으로 출가했고 둘째 누이는 상주 청리 한씨 가문으로 출가했다. 자형 한정봉 씨는 평소에 처남 정희 씨를 몹시 아껴 왔다고 한다.

박정희의 가문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음 9월 30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慶尙北道 善山郡 龜尾面 上毛洞) 171번지에서 아버지 박성빈(朴成彬)과 어머니 백남의(白南義)사이의 7남매(5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 가계(家系)를 보면 박씨(朴氏)의 시조는 박혁거세(朴赫居世)이나 그 뒤 여러 갈래로 갈린 분파(分派)중에서 박정희는 고령박씨(高靈朴氏)에 속한다. 고령박씨는 박혁거세의 29세손이며 신라 제54대 왕인 경명왕(景明王)의 둘째 아들인 언성(彦成)을 제1세로 치는 본(本)이다. 어떻든 박(朴)씨는 김(金)씨 이(李)씨와 함께 우리 나라 3대 성씨의 많이 배출하였다. 박정희의 집안은 선대부터 무인이 많았고 보수적 기질이 강한 편이었으나 때때로 엉뚱한 인물이 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조선시대의 박은(朴誾)과 박문수(朴文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도 박문수에 관한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어 왔다. 박문수전(朴文秀傳)은 조선시대의 억눌렸던 민중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희망이요 생명의 불꽃이었다. 즉 박문수라는 의인(義人)이 있어 사회정의를 구현해 보려고 하는 암행어사(暗行御史)의 행각에서 민중들의 뜻을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 조의 때 임금 앞에서 머리를 치켜들고 말을 하는 사람은 박문수뿐이었다. 다른 신하들이 모두 탓하자 "임금과 신하가 한몸이나 다름없는데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말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니 임금도 "문수의 말이 옳다"고 했다. 또한 이인좌가 난리를 일으키자 분연히 일어나 난리를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국가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의인(義人)이요, 불의(不義)를 보고 참지 못하는 것이 의인이며, 하나의 원칙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사람이 의인이다.
박문수는 도승지(都丞旨), 병조판서(兵曹判書)라는 벼슬보다도 한 시대의 정의를 확립하기 위해 많은 일화를 남긴 암행어사로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장원시(壯元詩)인 낙조(落照)는 세상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던 시구이므로 박정희도 그 시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령박씨라고 하면 얼른 생각나는 인물이 박문수이다. 또 박문수라고 하면 의(義)로운 것을 생명보다 더 소중한 가치로 인식했던 사람인 만큼 박정희도 비록 방조(傍祖)이기는 하지만 그 선대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아버지 박성빈

박정희의 가풍도 유교전통을 숭상하는 집안이었다.
고조부 증조부 조부 때까지는 독손으로 내려오다가 그의 아버지 대(代)에 와서 성빈(成彬) 용빈(龍彬) 일빈(一彬)의 3형제가 태어났으나 성빈 이외에는 잘 모르는 실정이다. 그의 할아버지 박영규(朴永奎)때까지는 성주군 월항면 철산(星州郡 月恒面 哲山)에서 살았다. 박성빈은 청년시절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자신의 뜻을 펴보고자 하였으나 나라의 운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사회의 기강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일본, 청국, 러시아의 외부 세력이 이땅에서 각축을 벌이게 되자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동학(東學)의 회오리바람이 천지를 진동시킬 무렵인 1892년에는 성주에서 22세의 젊은 나이 때 동학혁명의 접주(接主)가 되었다가 관군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는 하였지만 이미 나라의 형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매일같이 술로써 비분강개하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성격이 호방하고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으며, 대의명분에 살면서 술과 친구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가세는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할 수없이 고향에서는 살지 못하고 처가 곳인 선산군 약목(善山郡 若木)으로 이사를 했다가 다시 상모동(上毛洞)으로 옮겨 왔던 것이다.

어머니 백남의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白南義)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 집안은 고려시대의 대학자이며 우리 나라에 성리학을(性理學)을 전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백이정(白滯正)의 후예다운 체통을 지키기 위하여 어린 자녀들에게도 삶의 법도를 엄격하게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남의는 어려서 비교적 호강스러운 생활을 했으며 학자의 집안에서 양반집 규수로 곱게 자라 박씨문중으로 시집을 갔던 것이다. 그러나 처녀 때부터 담배를 좋아하는 습관이 생기고 말았다. 어려서 횟배를 앓아 방바닥에서 뒹굴면 어머니가 할아버지의 장죽에서 담뱃진을 꺼내 그것을 물에 타서 마시게 하면 씻은 듯이 배앓이가 멈추는 것이었다. 한두 번 약으로 쓴 것이 차츰 습관화되었다. 그리고 그는 또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할아버지의 담배불 심부름을 하다보니 담배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담배를 무척 좋아하시고 어린 손녀가 장죽에 담배불을 붙여다 주는 것을 또한 기뻐하였다. 그러므로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할아버지가 일어나실 시간이 되면 꼭 두새벽에 부엌으로 나가 화로에 불을 새로 다독거리고 할아버지 장죽에 불을 붙여드리는 심부름을 했던 것이다. 그 일이 반복되어 습관화될 수밖에 없었고 자연 담배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집온 새색시가 어른들이나 시집식구들 앞에서 담배를 피울수는 없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 남편은 일찍부터 과거(科擧)니 동학(東學)이니 하면서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사를 혼자 다할 듯 나돌아 다니기만 하니 가세가 점점 기울기만 하였다. 그런 중에서도 남편은 아내의 심중을 헤아리고 가끔씩 담배봉초를 사서 들고 들어와 피우라고 하였으므로 백남의는 남편이 그처럼 고마울수가 없었다. "큰 인물은 훌륭한 어머니 밑에서 나온다는 말을 실감하였습니다. 내가 대구사범학교 시절에 박정희의 집을 방문하여 하룻밤 묵었던 일이있었는데 그때 그의 어머니는60세가 넘었는데도 미인이었습니다. 몸집은 자그마하였지만 빈틈이 없고 자상하면서도 온화한 풍모가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상이었습니다. 남편을 대신하여 살림을 책임진 그의 어머니는 봄바람처럼 훈훈하고 다정하면서도 서릿발같은 기품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막내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자식을 가르치기 위하여 좋아하던 담배까지 줄여가면서 절약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자식들에게 주고 간 분이며 그것이 대통령을 키워낸 밑거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동기생 권상하(權尙河)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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