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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

존경했던 스승님들

사범학교의 교과과정(敎科課程)은 전인교육(全人敎育)을 지향했다.국어(일본어), 조선어, 영어, 한문, 교육학(교육원리, 교육사, 교육심리, 교육철학), 경제학, 수학, 생물, 화학, 물상, 역사, 지리, 음악, 미술, 서예, 체육 등이며 교사로서 필요한 실기교육을 중요시 했다.

박정희의 문필가 못지 않는 문장력, 시적(詩的) 표현력, 운동, 작곡, 미술,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에 폭넓은 교양교육을 받은 덕분이다.

그 당시 대구사범학교에는 여섯 분의 조선인 선생님이 있었다. 그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 박관수(朴寬洙) : 교육학
  • 염정권(廉廷權) : 한문
  • 구자균(具滋均) : 조선어
  • 김영기(金永驥) : 조선어
  • 신현길(申鉉吉) : 경제학
  • 김용하(金容河) : 교육학

그 중에서도 박정희의 동기생들에게 가장 깊은 감명을 준 것은 김영기 선생과 염정권 선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선인 교사들이 은연중에 민족주의 교육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박정희가 입학하기 전 해인 1931년 11월에는 대구사범학교에 큰 태풍이 한 번 불고 갔다. 즉 당시 조선이 교사였던 현준혁(玄俊赫)이 <한글>을 보급하며 학생들에게 문맹퇴치운동을 벌이도록 했고, 1929년 <광주학생사건>이 나자 이의 당위성을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1930년에는 학생들과 함께 <사회과학연구회>라는 사상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이 조직이 일본경찰에 적발되어 현준혁과 간부들이 구속되고 수십 명의 학생이 퇴학처분을 당했던 것이다.이 사건을 일제의 재판기록에서는 공산주의운동으로만 규정하였으나 사실은 일제로부터의 민족해방운동이라는 대전제가 앞섰던 만큼 민족운동이었다.

일제의 황민화(皇民化)교육이 심화될수록 조선학생들의 반발도 적지않았고 민족혼을 되찾는 기운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대구사범의 조선인 교사들은 은근히 민족혼을 주입시켜 주었기 때문에 조선인 학생들은 큰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영기(金永驥)선생

김 선생은 1933년에 제정된 <조선어 철자법 통일안>을 교재로 삼아 학생들에게 한글은 알뜰히 가르쳤다. 박정희가 비교적 정확한 맞춤법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김 교사의 덕분이다.

김 선생은 조선어 시간에 조선사(朝鮮史)를 가만히 가르쳐 주기도 했다. 고시조는 물론 고려 삼은(三隱), 사육신(死六臣), 이율곡(李栗谷)의 10만 양병론, 이순신(李舜臣)과 임진란(壬辰亂) 등을 가르치면서「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있다.」는 속담으로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하며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데 힘썼다.

그리고 중국 상해(上海)에 대한민국의 임시정부가 있고 김구(金九), 이승만(李承晩), 윤봉길(尹奉吉), 주시경(周時經)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 주었다.

특히 남이(南怡)장군의 한시(漢詩)를 가르치는 대목에서는 그 기개의 호방함을 찬탄하면서 학생들에게 원대한 포부를 심어주고자 했다. 김 선생은 박정희의 동기생들이 졸업한 뒤 학생30여 명과 지하독립운동을 했다고 구속되어 그 중 5명은 고문으로 옥사하고 김 선생은 8.15해방으로 석방되어 평생 동안 교육계에서 헌신했다.

박관수(朴寬洙)선생

박 선생은 경남 울산 출신으로 일본의 히로시마(廣島)고등학교를 나온 분이다. 8.15해방 후에는 경북대학교 법과대학장을 역임했다.

대구사범 교사시절에는 칠판에 큰 글씨로 하이래호(何以來乎)를 써놓고"학생 여러분! <왜 왔는가? 왜 태어났는가?>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반드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여러분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깊이 자각해 주기 바란다"라고하여 암시적인 말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염정권(廉廷權)선생

염 선생은 경성제대(京城帝大)철학과를 나온 젊은 교사였다. 한문시간에 민족정신을 정열적으로 불러넣기도하여 학생들에게 많은 감명을 준 것이다. 그 당시 염 교사에게 배운 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에 나오는 글귀들을 박정희는 가끔 인용했다. 그리고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의 당시(唐詩)도 좋아했다.

염 교사가 학생들에게 시간의 소중함을 역설하던 한시(漢詩)를 박정희는 무엇보다도 좋아했던 것이다. 중국의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은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성년은 다시 오지 않고 盛年不重來
하루에 새벽은 두 번 없으니 一日難再晨
때를 따라 열심히 공부하여라 及時當勉勵
세월은 사람은 기다리지 않는다. 歲月不待人


인생에 있어서 한 번 지나간 시간이나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젊은 날에 부지런히 갈고 닦아서 대망(大望)을 성취하라고 염교사는 강조했다. 같은 내용의 한시(漢詩)로 박정희의 뇌리 속에 박힌 또 한 수(首)가 있었다.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특히 마음이 울적할 때면 그는 콧노래처럼 평생을 읊었던 마음 속의 노래이기도 했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도다 少年易老 學難成
잠깐의 시간인들 가볍게 할 수 있을 것인가 一寸光陰 不可輕
연못가 방축의 풀은 아직 봄꿈을 깨지 못했는데 未覺池塘 春草夢
섬돌 앞의 오동잎은 벌써 가을 소리를 내누나 階前梧葉 己秋聲


염 교사는 광복 이후 여운형(呂運亨)과 손잡고 정당활동을 하기도 했고 미군정(美軍政)때는 입법원 의원을 지낸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므로 박정희의 한문실력이나 서예는 그 무렵에 익힌 것이다.

박정희는 <10월유신>이 일어나기 몇 년 전에 사범학교 동기생인 권상하에게 <기명유신(其命維新)>이라는 글귀를 써 주면서 "이거 알지?"라고 했다. 물론 사범학교 때 염 교사로부터 배운 글귀다.

「주수구방 기명유신(周雖舊邦 其命維新)」

주(周)는 비록 옛 나라이지만 개혁으로써 천명을 새롭게 했다는 뜻이다. 뱀이 살아남기 위하여는 허물을 벗어야 한다. 하나의 민족이나 국가가 발전하는 데도 낡은 껍질을 벗어야 한다. 사회개혁을 통한 새로운 나라의 건설, 사회제도의 확립을 박정희는 꿈꾸고 있었다.

그러므로 박정희는 <유신>이란 개념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 뿌리는 사범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교육의 힘은 그만큼 막중한 것이다.

신현길(申鉉吉)선생

신현길(申鉉吉)선생은 깐깐했던 분으로 알려져 있으며, 김용하(金容河)선생은 경성제대(京城帝大)를 나왔던 분으로서 달필인 데다가 선이 굵었던 선생님으로 잘 알려져 있다. 8.15해방 이후에는 한국의 교육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구자균(具滋均)선생은 고려대학교에서 오랫동안 봉직해 왔으나 박정희가 직접 배우지는 않았던 분이다.

당시 대구사범학교에는 조선인 선생님들만 존경을 받은 것은 아니다.

히라야마 다다시(平山 正)교장과 교육철학을 가르치며 박정희의 담임교사이기도 했던 기시 요네사쿠( 岸 米作)는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들로서 한국학생들에게도 존경을 받던 선생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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