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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박정희

민족 차별에 대한 불만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한 박정희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민족차별교육에 불만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반골기질이 있는 그로서는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이 노골적으로 자행되자 학업에 대한 열의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5년 동안에 걸친 그의 학교생활에서의 학업성적은 좋지 않았다. 언제나 성적은 하위에 머물러 있었으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결석이 많았다. 그리고 학년별 종합적인 평가란 에서도 빈곤, 음울, 활발하지 못하다고 적힌 곳이 많은 것으로 보아 그다지 활발한 학교생활을 한 것 같지는 않다.


특히 결석일수가 전체 수업일수의 약20%에 이르고 있어 사범학교의 교육이 그에게 흥미를 주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범학교 교육이 그의 적성에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적성에 맞았던 것은 교련과 체육이었기 때문에 사격과 총검술 등에 많은 흥미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이 기간 동안에 학업성적은 비록 좋지 않았지만 세계문학전집, 플루타르크 영웅전, 고전(古典), 역사, 소설, 전기등 다양한 독서를 하면서 지적(知的)세계를 넓히고 교양을 쌓았다.

그러므로 그때의 은사이던 김영기(金永驥)선생의 증언에 의하면「박정희는 학생시절부터 무인다운 기골을 지니고 있었으며 입은 천근(千斤)같이 무겁고 성격은 침착했으며 청백한 기품과 함께 정의감이 강했다. 새벽같이 고요하면서도 태산처럼 무거웠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조선사회는 일본인과 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이 노골화되어 일본인은 우월감에 들떠 있는 반면 조선인은 기를 펴지 못하고 지냈다.

면장이나 읍장인 조선사람이 일본인 순사에게 뺨을 얻어맞는 것은 예사이고 조선 사람들은 마을에 순사가 나타났다고 하면 아무 죄도 없이 그냥 벌벌 떨기만 했다.

박정희는 어려서부터 그와 같은 광경을 눈여겨 보며 지내왔다. 그러므로 조선민족에 대한 자책감과 일본민족에 대한 적개감이 동시에 그의 가슴속에는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못난 조선민족을 일깨우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저 못된 일본민족의 콧대를 꺾어놓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자라나온 박정희에게 반골기질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사범학교 시절에는 막연하게나마 민족에 대한 의식이 형성되어 갔던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황민화(皇民化)정책을 그대로 순종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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