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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기술센터 안내

농가생활실/농부의 일생

우리 민족의 생업은 옛부터 농경이 중심을 이루어 왔다.
그래서 "농사는 하늘아래으뜸 근본" 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전통사회의 농업활동은 거의 사람의 힘에 의존해 왔다. 그리하여 아이를 많이 낳는것, 특히 남자아이의 출산은 농업활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아들은 가계를 계승할 뿐만 아니라 딸보다 건장한 노동력을 지니기 때문이었다.

혼인 뒤 여러 해가 지나도 아이를 낳지 못하면 아이 갖기 위한 주술적인 행위를 하는데 모든 정성을 기울였다.아기를 낳으면 대문에 금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막는다. 태어난 후 100일이 되면 백일잔치를, 첫 생일인 돌이면 돌잔치를 벌인다. 남자 15세에서 20세 사이, 여자 15세가 되면 상투를 틀고 쪽을 찌는 관례와 계례를 행하여 어른이 되었음을 알렸다. 농민들 사이에서는 '들돌들기' 라는 성년식이 있었다. 이는 농경사회에서 한 사람의 일꾼으로서 능력을 판가름하는 의례였다. 성년식을 치른 이후에야 양가의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남. 녀가 혼인을 하게된다.

혼인 후부부는 일정한 농토 상속받아 분가하여 독립된 가정을 꾸미고 농업들 생계로 살았다.태어난지 60년이 되면 회갑잔치를 하게 되는데 평균연령이 낮았던 과거의 회갑이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혼인 후 만60년이 되면 혼례 절차대로 회혼례를 올렸다. 자손들이 부모의 혼인 6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베푼 잔치였고,부모에게는 젊음의 기분에 잠기게 하였다. 그리고 죽은 후의 상례는 일생을 마감하는 의례이고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보내는절차인 만큼 시신 처리, 안장, 탈상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고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례는 자손들이 사자를 조상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의례였다.

기자

기자 이미지

기자는 자식이 없는 부녀자가 자식, 특히 아들을 낳기 위하여 행하는 여러형태의 신앙행위를 말한다. 기자행위는 고대부터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아들을 중시함으로써 더욱 성행했다. 기자행위의 형태는 지역과 집안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부처, 장승같은 초월적인 존재와 영험이 있다고 믿는 자연물에 치성을 드리거나, 주술적인방법으로 특정한물건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했다. 가장일반적인 방법은 아기를 점지해준다는 삼신에게 비는 것이었다. 아기를 출산할때는 시어머니가 아기를 잘 받는 사람의도움을 받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삼신상을 차리고 삼신에게 감사의 뜻을 비손했다. 그리고 남.녀 성별에따라서 다른 형태의 왼새끼로 만든 금줄을 삼칠일 동안쳐서 부정을 타지 않도록 하였다. 갓난 아기에게는 땀을 잘 흡수하는 배내옷을 입혔다.

들돌들기

들돌들기 이미지

아이의 세계에서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는 유교적 성년식은 관례와 계례였다. 관례는 15세에서 20세 사이의 남자에게 상투를 들고 갓을 씌우는 의식이다. 한편 계례는 15세의 여자아이에게 쪽을 찌어 올리고 비녀을 꽂아주는 의례였다. 반면 서민층에는 복잡하고 형식적인 관례보다는 들돌들기 또는 들참례 라는 성년식을 치렀다. 들돌을 드는 것을 일꾼의 기준으로 삼아 들돌을 들면성년으로 인정하였다. 들돌을 드는 정도에 따라 상머슴 담살이 등으로 구분하여 새경을 결정짓기도 하였다. 들돌은 대개 정월 대보름에 당나무 아래서 들지만 유두, 칠석, 백중, 추석 등의 명절 에도 마을의 태평과 풍년무병을 기원하며 들돌을 들기도 한다.

성장

기자는 자식이 없는 부녀자가 자식, 특히 아들을 낳기 위하여 행하는 여러형태의 신앙행위를 말한다. 기자행위는 고대부터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아들을 중시함으로써 더욱 성행했다. 기자행위의 형태는 지역과 집안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부처, 장승같은 초월적인 존재와 영험이 있다고 믿는 자연물에 치성을 드리거나, 주술적인방법으로 특정한물건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했다. 가장일반적인 방법은 아기를 점지해준다는 삼신에게 비는 것이었다. 아기를 출산할때는 시어머니가 아기를 잘 받는 사람의도움을 받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삼신상을 차리고 삼신에게 감사의 뜻을 비손했다. 그리고 남.녀 성별에따라서 다른 형태의 왼새끼로 만든 금줄을 삼칠일 동안쳐서 부정을 타지 않도록 하였다. 갓난 아기에게는 땀을 잘 흡수하는 배내옷을 입혔다.

혼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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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는 장성한 남자와 한여자가 공식적으로 결합하며 새로운 사회적 지위를 얻고 가족을 만드는 것을 축하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혼례는 개인적인 의례인 동시에 사회적인 의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가족의 지속성을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혼례를 소중히 여기고 성대히 치렀다. 예혼인은 당사자의 의사보다 중매를 통하여 어른들이 맺었던 집안끼리의 계약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두 집안이 사주단자, 연길 등을 주고 받으며 신랑이 처가집에 가서 혼례를 올렸다. 혼례는 혼담이 시작되면서부터 대례를 거행하기 이전까지의 의혼,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행하는 모든 의례인 대례, 신랑집에 와서 행하는 행사를 지칭 하는 후례로 진행된다.

회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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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태어나서 만 60년 (61세)에 맞는 생일을 회갑, 또는 환갑이라고 한다. 한두달 전부터 자녀들은 집안단장을 하며 환갑은 맞는 부모님께 드릴 선물과 잔치준비를 계획성 있게 한다. 회갑날에는 당사자는 물론 그가족과 직계자손도 최상의 의복으로 성장하고 일도쉬고 회갑잔치가 성대하게 치러지도록 노력한다. 이날 아침에는 사당에 들어가서 조상께 회갑을 맞이한 것을 알리고 아침상을 받는다. 그러나 본격적인 회갑상은 손님들이 가장 많이 모였을 때 회갑주가 거처하는 사랑이나 대청 또는 마당에 자리를 깔고 병풍을 치고 낸다. 이상은 헌수상이라 하며 대단히 크게 차리는데, 밤, 잣, 호두, 대추, 곳감, 과자, 강정, 다식, 약과 등을 각각 원통형으로 높이쌓아올려 차리고 그사이에 국화, 매화, 용, 거북, 학의 모양으로 만든문어를 첨가한다. 준비가 되면 회갑을 맞는 어른내외를 방석위에 모셔다가 앉히고 헌수례를 행한다. 이는 회갑의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서, 자손들과 일가친척들이 차례로 절을 올리고 술과 안주를 권해 드리는 의식이다. 또, 회갑을 맞는 사람의 부모가 생존하고 있을 때에는 색동옷을 입고 부모앞에 절을 하고 재롱을 떨기도 한다.

상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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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례는 사자 처리의 한 방법인 동시에 옆에서 죽음을 지켜본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가정의 결손을 점진적으로 매워주는 의례이다. 전통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무서운 존재가 된다고 여겄으나 중국가례의 영향으로 살았을 때나 별다름이 없는 존재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돌아가신 뒤에 후손을 알뜰히 보살펴 준다고 믿어 상례는 만2년에 걸쳐 엄격한 절차로 근엄하게 행해졌다. 만 2년이 지나면 죽은 사람은 하나의 신위로서 손들로부터 제사로 받들어지는 대상이 되었다. 사람이 운명하면 혼이 나간 것으로 여겨 혼을 다시 불려들여 살아 가기로 바라는 초혼을 했다. 그래도 깨어나지 않으면 사자밥을 차리고 시신은 수시를 거쳐 향물로 깨끗이 씻기고 수의를 입히고 으로 처리했다. 이어서 성복을 한 다음 발인하고 상여로 옮겨 안장한다. 분묘가 완성되어 지내는 성분제 우제 소상대상의 순서로 상례절차는 끝난다. 묏자리는 자손의 길흉화복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고 믿었으며 이 뫼자리를 둘러싼 후손들간의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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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례는 원래 삶과 죽음의 세계, 신과 인간의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사제과의 종교행 위였다. 조상숭배 사상이 보편화됨에 따라 죽은 조상이 산으로 추앙되면서 제례는 널리 일반에게까지 확대시행되었다. 조사의 제사는 내용에 따라 3가지로 갈라진다. 돌아가신 날을 기준으로 밤에 4대조상을 범위로 제청에서 모시는 기제사, 명절이나 일정한 절기에 4대 조상을 범위로 낮에 사망해서 올리는 차례 그리고 4대조 이상모든 조상의 묘소에 1년에 한번씩 낮에 올리는 시향제와 구분되며, 차례와 시향제는 독축없시 단헌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제례의 철차는 신위가 내려오시기를 청하는 강신, 독축과 헌작으로 내려 오는 신위와 제물을 잡수시는 절차던 흠향, 끝으로 신위를 모셔 보내는 사신의 3단계로 나누어 진다. 제물을 홍동백서 어동육서 등과 같이 일정한 격식에 따라 차렸다. 제사는 가가례라고 하여 집안마다 제물의 내용과 진설 방법이 달라서 어느것이도 정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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