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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주역사 조선시대

조선태종 13년 선주군으로 개칭 후 도호부를 설치

1413년 (태종 13) 지방제도개편때 선주는 선산군으로 개명되었고, 인동현은 현명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각기 군수 · 현감이 파견되었는데, 선산군은 2년 뒤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세조때의 진관체제 성립에 따라 선산부는 경상도 우병영 상주진관에, 인동현은 좌병영 대구진관에 각각 속하게 되었다. 당시 이곳의 토지는 선산지역이 비옥한 반면 인동 지역은 비옥 · 척박이 반반이며, 풍속은 선산이 화려하고 학문을 좋아한 반면, 인동은 검솔(檢率)하고 양잠에 힘썼다고 한다.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호구수는 선산이 1,005호에 1만 2,012인, 인동이 657호에 4,551인이었다고 하는데, 구미시지역의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다. 한편, 고려말 이래 이곳은 학문적 연원이 깊은 곳으로 이름나, 인재(人材)의 보고(寶庫)인 영남지방 중에서 "영남의 인재 가운데 반은 선산에 있다(村半在一善)."라는 말조차 나오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통하여 이곳의 금오산성 및 천생산성(天生山城)의 구실이 중요시 되어 수축이 계속 이루어졌고, 1735년 (영조 11) 금오산성에는 독진(獨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들어와 면리제(面里制)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구미지역도 역사의 표면에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은 상구미면(上龜尾面)과 하구미면(下龜尾面)으로 각각 14개, 23개의 자연촌락을 관할하였다.

의의

선비문화의 시발점

고려 중기 이후 들어 온 성리학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국가통치를 위한 기본이념으로 자리잡게 되고 이후 조선500년간 학문의 발전과 수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여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생활의 규범이 되고 있으며,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의식 속에 가장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사상임.

고아읍 봉한리에서 태어나고 고려 삼은의 한 사람이며 조선 성리학의 개조라고 할 수 있는 야은 길재선생 이후 조선 성리학은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으로 이어져 지역 출신 학자들이 영남사림파의 종사가 되어 발전을 거듭하여 왔으며, 이러한 학문의 맥은 김굉필과 이언적을 거쳐 결국은 퇴계 이황선생에 이르게 되어 조선성리학을 학문적으로 완성하게 됨.

이러한 성리학의 발전은 학문을 연구하는 청렴한 선비정신에 의하여 이끌어져 왔으며 조선 성리학이 퇴계학으로 완성되기 까지는 지역 출신 학자들이 큰 줄기 역할을 함. 따라서 우리 구미는 조선 성리학의 근원지로서 또 학문을 연구하는 선비문화의 본거지로서 명성을 떨쳐왔음.

아직도 우리 지역에는 당시의 교육기관인 금오서원, 동락서원, 선산향교, 인동향교등의 유적이 남아 옛 시절의 글 읽는 소리가 들 리는 듯하고 지역 유림에는 지금까지도 그 때의 맥을 이어가는 활동이 계속되고 있으며 최근 퇴계학 등 동양학문에 대한 서구의 관심증가 현상을 볼 때 감회가 새롭다고 하겠음.

조선 성리학 영남학파의 흐름도
  • 야은
    (冶隱)
    길 재
    (吉再)
  • 강호
    (江湖)
    김숙자
    (金叔滋)
  • 점필재
    (佔畢齋)
    김종직
    (金宗直)
  • 한훤당
    (寒喧堂)
    김굉필
    (金宏弼)
  • 회 재
    (晦齋)
    이언적
    (李彦迪)
  • 퇴 계
    (退溪)
    이 황
    (李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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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예술과   박은진   054-480-6642
최종 수정일
20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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