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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실록 8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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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의 인문환경

선조실록 82권 (宣祖實錄 卷82)

선조 30년(1597) 1월, 이른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청야대변(淸野待變)의 산성 고수작전을 중시하고, 삼남의 모든 산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이때에 이원익도 금오산성으로 들어가 이곳을 전략본영으로 삼았다. 상주목사 정기룡이 감사대장군을 겸하여 상주진영하 9개 군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주목사 이수일과 함께 이 성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이곳 본영을 중심으로 하여 그 후 여러곳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니 그 중에서도 정기용이 인근 28개 군의 군병을 이끌고 고령까지 내려가서 1만2천명의 적을 전멸케 한 고령전투는 금오산성이 전략본영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감당한 큰 예라 하겠다. 그러나 정유년 9월 왜적이 금오산성에 침공하여 성 내부가 상당히 파괴된 것을 삼송유고 1권(三松遺稿 卷之一)에서 짐작할 수 있고, 그 이래로 10년간 방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선조39년(1606) 3월에 또다시 대대적인 수축이 단행되었다. 축성금오시일기(築城金烏時日記) 삼송유고 2권(三松遺稿卷之二)에 의하면 4월부터 공가(公家)를 다 없애고, 불탄 흔적을 치우고, 흩어진 기와를 모아서 객사, 무기고, 사창, 심지어 승군들이 묵을 승실까지도 5, 6개월간 공사하여 갖추었다고 한다.

금오산성묻힌 연못도 수리하고, 샘물도 다시 찾았으며 동원된 일꾼은 연인원이 3,400명, 성터는 2,361보(步)였다고 한다. 그 밖의 문루(門樓.西門), 포루(砲樓.南峯),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간까지 갖추어졌으며 성벽까지 보수를 끝내는데 약 1년 가까이 소요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안 가장 높은 곳에 보봉사(普峰寺)가 있었고, 진남사(鎭南寺)는 52칸인데 선조39년 병오년 4월 29일에 화주(化主) 태순(泰淳)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축성에는 승군과 8개현의 군인 2,731명이 동원되었고, 총 길이1,730보(步)나 되었다. 그후 30년 간 금오산성에 대한 상황은 잠잠하였다.

금오산성은 전란 중 영남 보장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선조 29년(1596) 11월초 우의정 이원익이 강원, 충청, 경상도 체찰사로 부임할 즈음에 성주 영중(營中)으로 내려가 금오산성을 수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동년 11월 16일 도원수 권율의 왜적 방어책에 관한 상계(狀啓)에 따라 비변사는 왕에게 진언하게 되었으니 금오.천생 두 산성은 동서로 낙동강의 험(險)을 끼고 있어 중로(中路)의 요충이므로 반드시 수호할 요지임을 강조하고, 경주의 부산, 삼가의 악견산성과 함께 장수를 골라 굳이 지킬 것과 이미 축성된 대구의 공산, 성주의 용기산성에는 인근 백성을 입보(入保)시키고, 창령의 화왕산성과 같은 요지는 급히 수축하여 긴급사태에 대비토록 해야 한다고 주청하여 재가를 받았다.

페이지 담당자
  • 금오산도립공원관리사무소   조성호   054-480-4605
최종 수정일
2020-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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