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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실록 1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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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의 인문환경

태종실록 19권(太宗實錄 卷19)

금오산성은 세종 7년(1425)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 산성조에 경상도 31개 산성의 하나로 기록 되어있다.

그 특성이나 규모에 대한 기록을 보면, "금오산성은 선산부의 남쪽에 위치하고, 지형은 높고 험준하여 천연의 암벽이 그 태반을 차지한다.

성의 둘레는 1440보(步)요, 성안의 넓이는 85결 (結)이며 3개의 못과 한줄기의 시내, 네 개의 샘이 있다. 또한 군창이 있어 개령과 약목의 군창이 아울러 설치되어 있다"는 것으로 금오산성이야말로 천험(天險)의 요새로서 상당한 규모로 정비되었음 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영남 보장(保障)의 요충지(要衝地)

금오산성은 세종 7년(1425)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 산성조에 경상도 31개 산성의 하나로 기록 되어있다.

금오산성이 국방상의 요충으로서 부각되기 시작 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이다. 선조 28년(1595) 8 월 비변사(備邊司)에서 상계(上啓)하기를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배설(裵楔)로 하여금 전담토록 도체찰사 이원익(都體察使 李元翼)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진언(進言)하였다.

이 무렵의 기록으로 보아 금오산성의 수축은 당시 선산부사 배설에 의하여 완성된 듯하며, 승병대장 유정(泗溟大師)도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助力)하여 국난 극복에 크게 공헌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불교통사 상편(朝鮮佛敎通史 上篇)

배설은 산성을 수축하고 성내 진중에 구정칠택(九井七澤) 즉 아홉 개의 샘과 일곱 개의 못을 팠다고 대혜폭포 아래 도선굴로 가는 길목 바위에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 이라고 각자(刻字)한 흔적이 있다.

그리하여 그 다음날 11월 17일 도체찰사 이원익이 출발할 때 왕이 영남의 산성에 대하여 하문한 바 이원익은 성주산성은 수축한다 하더라도 형세와 계곡이 좋지 못하여 군사가 주둔하기에 불편하므로 선산 금오산성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수비케 할 것을 상주하였다.

왕은 다시 금오산성에 물이 없음을 걱정하니 이원익은 물은 우물을 파면 얻을 수 있으며 성안에는 육지와 평야가 상망(相望)하고, 민호(民戶)도 조밀하여 왜적 방비에 극히 좋은 조건임을 역설하였다.

연후에 임지로 떠난 이원익은 영남, 호남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견벽청야(堅壁淸野)와 거험적축 (據險積蓄)의 방어책을 점검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병신년(1596) 겨울부터 금오산성의 수축(修築)이 시작되었다.

페이지 담당자
  • 금오산도립공원관리사무소   조성호   054-480-4605
최종 수정일
2020-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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