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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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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설과 설화

괘혜암(掛鞋岩, 신걸이 바위)의 전설

인의동(仁義洞) 네거리에 있는 선돌(立石)이다. 옛날 인의동의 고을 관아(官衙)가 설치될 무렵 한 풍수(風水)가 이르기를「이 고장은 고을로서 적당하지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그 까닭인즉 동쪽의 산이 고개를 내밀고 언제나 인동고을을 집어 삼킬 듯 도둑이 남의 집을 엿보듯 무엇을 훔치려고 넘어다 보고 있는 형상이니 여기에다 고을을 정하면 오래가지 못하여 망한다는 것이다.
이에 고을 원님은 그 풍수에게 해결방도를 물으니 그 도둑을 잡는 길밖에 없다고 하면서 고을 입구 세곳에 세 개의 바위를 세우면 된다고 하여 세워진 바위중 그 하나가 괘혜암(掛鞋岩)으로 곧, 신걸이 바위인 것이다.

조선조 선조때 인동현감(仁同縣監)으로 도임한 이등림(李鄧林)은 너무나 청렴결백(淸廉潔白)하여 고을은 물론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부임한지 1년만에 다른 곳으로 전임되어 떠나게 되엇다.

이때 한 여노비(女奴婢)가 짚신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 이등림(李鄧林)이 그 짚신은 왠 것이냐고 물으니 그 여노비는 '맨발로 나서는 것을 본 아전(衙前)이 신고 가라고 준 것입니다.' 하니 이등림이 말하기를 '그 짚신도 관물(官物)이니 사사로이 써서는 안 되니 이 바위에 걸어두고 가라' 하고 엄명을 내렸다. 이에 여노비는 짚신을 바위위에 걸어두고 떠났다.

이로부터 이 바위를 신을 걸었다는 연유에서 괘혜암 즉, 신걸이 바위라 부르게 되었고 후세의 청렴결백(淸濂潔白)한 마음을 영원히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괘혜암이라 새겨 놓았으며, 이로부터 인동은 풍년이 들고 어진 원님이 뒤를 이어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주민들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도리사(桃李寺)와 직지사(直指寺)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짓고 금산(金山)(지금의 김천시) 금릉땅을 바라보니 황학산(黃鶴山)중턱에 좋은 절터가 보이므로 승도들에게 손가락으로 절터를 가리켰다하여 절 이름을 직지사(直指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직지사는 신라(新羅) 눌지왕 2年(418)에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그 후 936년에 능여대사가 중건하였는데 완공을 보지 못하고 입적(스님이 돌아가심)할 때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말하기를
"이산 아래 큰 절터가 있음을 아는가?"
하고 턱으로 가리켜 주었다 하여 "직지사"라고 했다는 전설도 있고 또 능여대사(能如大師)가 이절을 중건할 때 자를 쓰지 않고 손으로 측량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전설도 있으나 "도리사"가 신라 최초의 가람(伽藍)이란 것이 이미 판명되었고, 아도화상이 수도했다는 곳에서 똑바로 정면에 직지사가 있는 것을 보면 아도화상(阿度和尙)에 의해 비롯된 것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는 많은 승병을 이끌고 왜병과 싸워 전공을 세웠으며 일본과의 외교에서 많은 활약을 하여 포로를 구출한 사명당(四溟堂)이 13살에 직지사에서 수도하였다.
이렇듯 도리사와 직지사는 불가분의 인연을 갖고 불도의 수련장이요 호국의 도량(道場)으로서 우리 겨레와 영고성쇠(榮枯盛衰)를 함께하여 왔다.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의 유래(由來)

  • 금오산 마애보살입상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은 변모하지 않고 변화에 따라 문명사회(文明社會)를 자애(慈愛)에 가득찬 표정(表精)으로 바라보는 듯 이곳을 거치는 사람마다 주목을 끌고 있다.

    신라시대(新羅時代)에 나당연합군이 이 백제(百濟)를 칠 때 당(唐)나라에서 판견된 한신(韓信)이라는 장군(將軍)이 어느 전장(戰場)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만 백제군(百濟軍)의 포로(捕虜)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보살(普薩)이 희모시자(希毛待者)(중국 항주의 승려회통에 기록)로 변신하여 나타나 도망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이에 한신장군(韓信將軍)은 본국(本國)에 무사히 돌아갔지만 생명의 은인이었던 희모시자(希毛侍者)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얼굴이 생각되어 이곳 황상동(黃桑洞)의 암석(岩石)에 조각(彫刻)하였으니 곧 마애여래입상(摩崖如來立像)인 것이다. 現 보물(寶物) 第1122號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불상(佛像)을 조각(彫刻)한 뜻은 신라(新羅)의 영원(永遠)한 통일(統一)을 기원(祈願)하며 사방정토(四方征討)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이 땅에 성취(成就)하기 위함이라 한다. 오늘도 이 석불상(石佛像)에 진심(眞心)을 가지고 기원(祈願)하게 되면 모든이 즉 중생(衆生)들의 병(病)을 낫게 한다고 하여 신자(信者)들의 발걸음이 끓이지 않고 있다.

비봉산의 유래(飛鳳山의 由來)

선산읍을 감싸고 있는 비봉산(飛鳳山)은 글자의 뜻 그대로 봉황이 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봉황은 역사상 상스러운 새로 생김새는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 모양 등을 하고, 키는 6척 가량이며, 목과 날개에는 5색 빛 찬란하고 다섯가지의 울음소리를 내며 성품이 어질고 청결하여 나는 새 가운데 왕이라 칭한다.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순이 아니면 먹지 않으며 신성한 물만 마시고 산다고 하며 성인군자가 나야만 이 새가 나타나는데 용, 거북, 기린과 함께 사령(四靈)이라는 전설의 성스러운 새라 한다.

지리학설에 의하면, 비봉산은 봉황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에 날으려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동쪽으로는 교리 뒷산, 서쪽으로는 노상리 뒷산이 있어, 두 날개이며 출장소 뒤의 봉우리가 몸과 모가지가 된다. 가운데의 봉우리 아래에 출장소가 자리잡고 있어 봉의 입이 옛 군청사를 문 것과 같다 한다.

나는 것일까? 날으려는 것일까? 늠름한 기상, 수려하고 장엄한 기상은 정말 선산의 진산(鎭山)이요, 산중의 산으로 명산(名山)이며 산의 조종(祖宗)임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산의 모양으로 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는 옛말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비봉산은 북쪽에서, 금오산은 남쪽에서 서로 안을 지키고 감천은 동으로 흘러 낙동강과 이어져 외부를 지키면서 아주 튼튼한 천연의 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선산읍민들에겐 큰 걱정이 있었다. 비봉산의 봉새가 날아가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아읍 황당산에 그물을 친다는 의미로 동네 이름을 "망장(網張)이라 했으며, 물목동네 뒷산을 "황산(凰山)"이라 이름 지어 짝을 맞춰주기도 했다. 그것은 봉(鳳)의 수컷이요, 황(凰)은 암컷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산읍 사방동네를 죽장(竹杖)이라 하여 대나무를 심어 대나무 순으로 먹이를 대어주고 화조리 또한 봉황을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만화백조(萬花白鳥)가 있다는 뜻이며, 다시 동리 이름을 영봉리(迎鳳里)라 한 것은 봉황을 맞이한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며. 무래리(舞來里) 역시 봉황이 날아오는 것을 뜻한다. 그 뿐만 아니라, 봉황은 알을 다섯 개를 낳는데 한 개는 이미 앞들에 있는 동산이므로 다시 네 개의 동산을 만들어 다섯 개의 동산이 되게 하였다. 이것은 이 다섯 개의 알을 봉황이 품고 영원히 깃들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다섯 개의 동산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허물어져 1966년 경지 정리에 따라 자취를 감추고 지금은 한 개의 동산만이 남아 있다. 한편, 임진왜란때에 명나라 장군이 이 산을 보고 인재가 많이 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비봉산 주령 허리를 끊고 장작으로 불을 피우고 큰 쇠못을 꽂았다고 전하여 온다.

※ 참고문헌 : 택리지(擇理誌)ㆍ선산군지(善山郡誌)

용샘에 얽힌 사연

  • 금오산 마애보살입상

    금오산 마애보살입상(磨崖菩薩立像) 옆 절벽밑에 옹달샘이 있다.

    이 샘에는 용이 못된 강철이가 살고 있었는데 이름하여 이무기라고 전한다. 이 이무기는 길고도 모진 천년이란 세월을 지난 후 마침내 바라고 바라던 등천(登天)의 날이 왔다.

    어느 따뜻한 봄날 바위를 타고 천지가 진동하는 큰 소리를 지르며 서서히 하늘로 오르고 있던 그때 공교롭게도 언덕 아래 양지편에서 산나물을 캐던 아낙이 너무나 뜻 밖에도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와 등천(登天)하는 광경을 보는 순간 놀란 나머지 방정맞게 요망스럽게도 그만 "저 이무기 봐라"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천년 묵은 이 이무기는 원통하게도 용(龍)이 못되고 「처절-퍽」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으니 천애(天涯)의 낭떠러지 암벽(岩壁)엔 떨어질 때의 흔적으로 홈이 패였고 비늘 자욱이 남아 있으니 이 바위를 용회암이라 하며, 절벽밑의 이 옹달샘을 용샘이라 부른다.

    이 근처에 묘(墓)를 쓰면 가뭄이 온다고 해서 가뭄이 심할 때면 주민들이 묘를 찾아 파해치면 그날 밤부터는 틀림없이 비가 온다고 하는 영험있는 곳이라 전하고, 가물 때는 기우제(祈雨祭)을 올리기도 했다 한다.

천생산성(天生山城), 미덕암(米德岩)의 전설

  • 천생산성 미덕암

    인동의 구읍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4km되는 지점에 사방이 자연 석벽으로 된 절험의 산이 있으니 이 산이 바로 천생산성이다. 이 산의 서쪽에 불쑥 튀어 나온 큰바위가 자리 잡고 있으니 옥산지(玉山志)의 천생산성조에 의하면 밀득암(密得岩)이라 한다. 근세에 이르러 미덕암이라 부르고 있으니 이는 쌀(米)의 덕을 보았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천생산성은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세칭 홍의장군이라 불리워진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가 의병을 모아 천생산성에 집결시켜 왜적과 싸웠다는 전설이 있다.

    이 산성은 천연적으로 깍은 듯이 험준하게 생긴데다가 곽장군의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요새지로서 왜군이 아무리 공격해도 함락할 수가 없으므로 공격에 지친 그들은 한 계략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왜군은 인근 민가에 내려가서 저 산성에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물이라고 하였다. 이 귀중한 정보를 탐지한 왜군은 이 산 기슭에다 큰 못을 파니 산위의 샘물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산성 안에서는 식수가 적어서 큰 고난을 겪었지만 이에 홍의장군은 굴하지 않고 기발한 계책을 세워 이 산성에 물이 많이 있다는 것을 왜군에게 보이기로 계획을 꾸몄다. 홍의장군은 밀덕암 바위 끝에다가 백마를 세우고 말 등에다 쌀을 주르르 부으면서 말을 씻는 모습을 하였더니 멀리서 바라보는 왜군은 마치 물로써 말을 씻고 있는 것같이 보였던 것이다. 이 것을 바라 본 왜군들은 자기들이 정보를 탐지한 것과 달리 산성에 물이 많아서 말까지 씻기니 공격을 단념하고 물러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참고문헌 : 내고장전통가꾸기(구미시)

비봉산의 유래(飛鳳山의 由來)

단종(端宗)을 위하여 충절(忠節)을 다하고 세조(世祖)의 참혹한 형벌을 당하여 죽음을 털끝같이 여기며 대의(大義)를 태산처럼 지킨 사육신(死六臣)의 한분이신 단계(丹溪)하위지(河緯地)는 네 아들과 한 딸이 있었으니 장자는 호(琥), 둘째는 박(珀)이라 하였다. "호"는 이미 생원(生員)에 올랐으나, "박"은 아직 어린아이를 면치 못하였으니, 두 아이 모두 어린 나이었다.

날마다 서당에서 글을 익힘에 있어 열성이 남달랐는데 아버지가 단종을 위하여 복위를 꾀하다가 형(刑)을 받고 돌아가신 뒤, 조정에서 내린 엄한 명으로 이 네 아들마저 죽게 되었다. 호와 박의 형제는 서당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가, 돌연히 들이닥친 형리(刑吏)들에 의해 온몸이 포박되어 형장(刑場)으로 끌려 오게 되었다. 온 고을은 물끊는 듯한 소란과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으며, 이 형제의 참형(斬形)을 구경하려고 온 사람들로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 호의 형제는 어머님과 이미 이 화가 올 것을 미리 짐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위하는 충성의 불타는 단심(丹心)이 어찌 단계 한사람에게만 있으랴? 실로 하씨 한가족은 하늘이 내린 충(忠)의 화신(化神)이었던 것이다. 형리(刑吏)의 명령대로 땅에 꿇어앉은 "호"에게 수령이 묻는다.

"네 아비가 충성(忠誠)하지 못해서 죽었음을 알진대 마땅히 자식된 너희도 어찌 죽음을 면하랴?"

고개를 수그린 채 "호"의 대답은 조금도 당황하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하기를,

"나라 일을 거역한 죄로 아버지가 이미 죽은 뒤에 자식들이 어찌 살아 한 생명을 아끼리 요마는 한가지 소원이 있으니, 청컨대 들어 주오리까?"

"무엇이냐? 말하라" 수령은 묻는다.

"저희들은 집에 어머님이 계시는지라 잠깐 나아가 이별을 고하고 올 것이니 여가를 허 락하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집에서 체포되어 온 것이 아니라 형제는 서당에서 붙들려 온 것이다. 수령은 이형제의 효도하는 마음에 감복하고 기특히 여겨 또 마음속으로 측은한 생각이 들어 드디어 잠시동안 이별을 고하고 올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형제는 곧 집으로 달려가 어머님을 뵙고 엎드려,

"소자는 아버님의 뒤를 따라 오늘 죽음에 나가오나 한가지 아뢸 말씀은 원컨대 누이 동생으로 하여금 불량한 무리들의 종이 되게 말으시고 어머님은 평안하게 만수무강 하소서."

말을 마치고 사당(祠堂)에 절한 후 형장에 돌아와 조용히 죽음에 이르니 그 때 이를 목격한 사람들이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하고 "범이 개를 낳지 않는다."하며 하위지 부자의 억울한 죽음을 애석해 하였다.

※ 참고문헌 : 선산군지(善山郡誌)

탑쌓기 (죽장리 오층석탑)

  • 죽장리 오층석탑

    선산읍 죽장리 죽장사지(竹杖寺址, 現 法輪寺 境內)에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탑은 화강석으로 된 약 10m의 거대한 오층석탑이다.
    옛날에 두 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서로 재주를 자랑하다가 오빠는 다른 곳에서 누이 동생은 죽장사에서 석탑을 세우게 되었는데 누가 먼저 세우는가 내기를 걸어 경쟁을 하였는데 누이가 먼저 우아하고 웅장한 이 석탑을 세워서 이겼다는 전설이 있다.

    ※참고문헌 : 선산의 맥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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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20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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